요리용 온도계를 들고 K팝 매장에 찾아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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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희 기자]
▲ 끝날 줄 모르는 폭염, 양산 소용없어요 끝날 줄 모르는 폭염이 지속되는 20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 햇볕이 쏟아지고 있다. |
ⓒ 이정민 |
아이 방학을 맞이해 k-pop을 좋아하는 작은 아이와 시내의 음반 매장을 찾았다. 아이돌 응원봉과 다양한 상품들을 구경하던 아이가 문득 가방을 열고 카디건을 꺼내 몸에 걸쳤다. 아이는 긴 옷을 입고도 춥다며 덜덜 떨며 구경하다 결국 못 견디고 건물밖으로 나갔다. 기운이 없어서 쉬고 싶다길래 집으로 왔는데, 그때부터 아이가 아프기 시작했다.
처음엔 두통이었다. 머리가 아프다며 힘들어하던 아이는 두통약을 먹고도 편히 쉬지 못했다. 다음날에는 눈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곧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열은 39도까지 치솟았고, 혹시 코로나19인가 싶어 검사도 했지만 다행히 코로나는 아니었다. 각종 염증과 발열의 원인을 알 수 없는 와중에 설사와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덥다, 춥다'를 반복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기운 없이 누워있던 아이는, 일주일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이가 아픈 기간 동안 배우자도 시름시름 앓았다. 회사가 너무 춥다며 늘 긴팔 셔츠를 입고 재킷까지 들고 출근하는 배우자는 입맛이 없고 두통이 심하다며 무기력하게 누워 잠을 청했다. 아이와 배우자가 걸린 병은 요즘 유행한다는 '냉방병'이었다.
냉방병에 걸린 가족들
친구에게 전화해 식구들이 냉방병으로 고생 중이라고 하소연하니, 더 심각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우리 집 아이는 요새 폐렴 걸렸어.'
친구의 아이는 폐렴, 또 다른 친구의 아이는 장염, 또 다른 아이는 코로나19... 어쩐지 겨울보다 여름에 아픈 아이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무더위를 잘 이겨내기 위해 에어컨을 틀고 시원한 음식을 먹으며 여름을 보내려는 것인데 도리어 너무 추운 실내온도가 병의 근원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해가 갈수록 여름은 예년보다 더 길고 덥게 느껴진다. 절기상으로 입하(5월 초)부터 입추(8월 초)까지를 여름이라는데 4월부터 에어컨을 트는 곳들도 많다. 서글프게도 더위보다는 한여름의 추위를 예방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환경을 위해 에너지를 절약해야 한다는 말보다 더 크게 와닿는 것은 건강하게 잘 살기 위해 냉방을 약하게 틀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여름을 외면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 K-POP 매장의 실내온도 34도인 바깥과 22도인 실내를 문 하나차이로 겪은 아이는 일주일을 내내 앓았다. |
ⓒ 임은희 |
나아가, 몸의 항상성(homeostasis, 인간의 신체가 내부, 외부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항상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 유지를 위해 집에서도 바깥과의 온도차를 줄여보기로 했다.
▲ 실내온도는 26도 이상으로 유지하기 낮은 실내온도에서는 두통과 발열이 있었지만 30도 이하의 실내온도에서는 충분한 휴식을 취할 경우 병에 걸리진 않았다. 우리 집 실내온도는 냉방, 송풍, 환기를 적절히 사용하여 26도에서 28도 정도를 유지했다. 아이들이 되려 건강해졌다. |
ⓒ 임은희 |
끓인 물을 늘 가득 채워두고 수시로 마셨고, 제철 과일과 채소로 비타민과 수분을 보충했다. 미지근한 육수에 얼음을 동동 띄워 면을 말아먹었다. 지나치게 더운 시간대에는 에어컨을 켜고 뭘 하기보다는 바닥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마룻바닥은 서늘해서 가만히 있으면 코끝이 선선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알만 굴리며 책을 보거나 눈을 감고 음악을 들었다.
▲ 흙길에서 만난 뱀딸기 아스팔트가 깔린 길보다는 자잘한 블록길이 덜 덥고, 흙길이 제일 시원하게 느껴진다. 길바닥의 작고 귀여운 식물들을 관찰하는 즐거움도 있다. |
ⓒ 임은희 |
그래서 우린, 같은 방향이라고 하면 나무가 더 많은 길을 골라서 천천히 걸었다. 피고 지는 무궁화와 부숭하게 자란 수크령(볏과의 여러해살이풀)을 구경하며 풀벌레 소리를 감상했다.
에어컨 고장나도 견딜 수 있을까 싶은 여름
지구에 거주하는 인류가 2124년까지 맞이할 100번의 여름. 그 여름 중에서 2024년 여름이 가장 시원할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후위기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한다.
폭염과 더위는 매년 가장 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기상 현상이다. 한국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폭염으로 사망한 사람들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시원하다 못해 으슬으슬한 실내에서 냉방병으로 고생하는 위험을 무릅쓰며 살아야 한다. 더워서 죽는 사람들과 냉방병으로 아픈 사람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여름이란 계절, 도대체 어떻게 보내야 할까?
에어컨을 강하게 트는 것을 에너지 낭비, 기후 위기 악화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큰 온도차는 무엇보다 사람의 건강에 제일 좋지 못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도차를 느끼지 못하고 평생을 시원한 공간에서 산다면야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럴 순 없으니까. 에어컨을 강하게 튼 실내온도에 익숙해져 있다가 정전이라도 일어난다면? 나는, 우리 가족은 그 상황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며칠 후 의도치 않게 날것의 여름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김포에 사는 친구와 강화도에 다녀왔다. 더운 날 서울에서 출발하는 나를 위해 차량정비소까지 다녀왔는데 강화도로 가는 도중 그만 에어컨이 덜컥 고장 나버렸다. 에어컨을 켠 차들이 창문을 닫고 달리는데, 우리는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얼음물을 마시며 강화도에 도착했다.
해가 뜨거우면 양산을 쓰고 땀이 나면 닦으면서 여름을 온몸으로 즐겼다. 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걷는 속도를 온도에 맞게 조절하며 여름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다.
더위를 피하려 에어컨을 튼 실내를 찾았을 때는 두통과 오한이 찾아왔었는데, 더위를 온몸으로 즐겼더니 오히려 몸이 가뿐해지는 신비를 발견했다.
인위적인 기계의 냉방에만 의존하는 대신, 여름의 무더위에 적응하는 법을 찾는 것 또한 건강하게 여름을 보내는 방법은 아닐까 싶다. 여름, 꼭 이겨내야만 할까. 이기지 말고 여름과 함께 어울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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