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거인'처럼, 우리도 이렇게 살면 진짜 망한다

김성호 2024. 8. 2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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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814] MBS <진격의 거인> 1기

[김성호 기자]

예고된 파멸이라고들 한다.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기후변화, 또 그것이 가져오는 수많은 종의 절멸, 마침내 닥쳐올 인류의 파멸까지가 수시로 경고되는 오늘이다. 인류를 오늘의 번영으로 이끈 산업화를 인류 사상 가장 무책임한 시기라고 규정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이제는 늦었다며 지구를 버리고 탈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까지 나오고 있다.

1991년 23시43분을 가리켰던 '운명의 날 시계(Doomsday Clock)'는 현재 23시58분30초를 가리키고 있다. 지난 30년을 기술발전과 경제확장을 통해 인간이 번영에 이르렀다고 평가하는 시각으로는 운명의 날, 즉 종말이 15분30초나 가까워졌단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인류는 진전했는가, 퇴보했는가. 적어도 운명의 날 시계는 후자라고 말하고 있다.

예고된 파멸에도 인류의 대응은 시원치 못하다. 당장 에어컨이 없으면 날 수 없는 계절이라며 커다란 건물 안 가득 냉기를 불어넣고 산다. 더우면 더울수록 에어컨 가동률이 늘어간다는 사실은 에너지 자립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한국의 사정을 고려할 때 민망하기까지 한 일이다. 여전히 65%가량의 에너지를 화석연료를 태워 얻는 한국의 상황에서 열효율이 턱없이 낮은 복합쇼핑몰이며 유리외관 건물들이 수두룩하게 지어지고 에어컨을 풀가동해 그 안을 쾌적하게 만드는 상황이 어딘지 부조화스럽게 느껴지곤 하는 것이다.

너무 큰 위기가 대응을 포기하게 만드는 걸까. 기후와 생태의 변화속도에 비해 더디기만 한 정책과 경제의 변화를 살피다 보면 인류의 대응이 무책임하고 무기력하게만 보인다. 여전히 위기를 고려하지 않는 듯한 여론이야 따로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테다.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포스터
ⓒ MBS
'진격거' 신드롬 만든 불세출 명작 애니

한화로 무려 26조 원 규모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다. 그중에서도 TV애니메이션은 시장을 지탱하는 중추라고 평가된다. 단순 광고뿐 아니라 2차 생산물 판매와 OTT 서비스 유통 등으로 이어지는 막대한 수익의 연결고리 중심에 TV애니메이션이 자리한다. 일본에서 단행본 만화로 성공한 작품이 하나같이 TV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화로 성공한 작품이라도 TV애니메이션으론 쓴맛을 보는 경우가 비일비재, 치열한 경쟁을 뚫고 승자의 자리에 서는 작품은 다른 많은 분야가 그러하듯, 극소수다.

<진격의 거인>은 2010년대 일본 TV애니메이션 업계의 대표적인 성공작이다. 이사야마 하지메가 약관의 나이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동명 만화 시리즈가 큰 성공을 거둔 것을 애니화한 것이다.

1기부터 4기까지로 종결된 이 시리즈는 1기가 처음 방영됐을 당시 심야시간대 편성에도 불구하고 5%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주목받았다. 2013년도 블루레이와 DVD 판매량에선 당당히 1위를 차지, <귀멸의 칼날> 시리즈가 있기까지 신드롬이라 불릴 만큼 큰 인기를 구가한 대표적인 애니로 자리매김했다.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적 흥행을 했고, 한국에서도 애니 팬 치고 이 작품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1기는 그 신화적 성공의 서막이다. 그 파격적 설정과 소재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배경은 인류가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시대다. 50미터 정도가 되는 높이의 벽 안에는 인류가 가득 들어차 있고, 바깥은 출입이 철저히 금지된다.

이유는 이렇다. 바깥에는 인간을 잡아먹는 거인들이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거인과의 싸움에서 멸망을 생각할 만큼 큰 타격을 받은 인류는 100년 전 커다란 방벽을 쌓고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고 전해온다. 그렇게 평화를 누린 지 100년 째, 방벽 안 최남단의 작은 마을에 앨런과 미카사, 아르민이라는 세 아이가 살아가고 있다.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스틸컷
ⓒ MBS
100년의 평화가 무참히 깨지던 날

이들이 사는 마을엔 주둔병단이라 불리는 군대가 주둔한다. 헌병단과 주둔병단, 조사병단이라는 세 가지 형태의 군대가 인류를 수호하는 가운데, 주둔병단은 외곽 마을에 자리를 잡고 질서유지에 기여하는 임무를 맡는다. 오랜 평화로 싸울 상대가 없는 군대다. 주둔병단은 자연히 해이해진 상태고, 벽 안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헌병단은 아예 만나볼 기회가 없다. 포부 큰 소년 앨런에게 유달리 멋지게 보이는 군대가 꼭 하나 있으니 다름 아닌 조사병단이다. 이들만큼은 벽 바깥으로 나아가 인류의 영역을 넓힐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조사병단은 판판이 깨지기만 하는 부대다. 나갔다 하면 태반이 다치고 죽어나가니, 시민들 사이에선 여론이 영 좋지 못하다. 어차피 거인이 벽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시대가 아닌가. 무려 100년 동안 벽 안은 평화로웠다. 그렇다면 굳이 세금을 들여 조사병단을 운용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할 필요가 무어란 말인가. 오로지 앨런 같은 피끓는 아이들만이 조사병단을 응원하며 벽 바깥을 꿈꾼다.

1기는 모두가 닥치지 않으리라 예상했던 거인의 공격이 닥쳐온 이후의 사건을 그린다. 장벽보다도 10미터는 더 큰 초대형 거인이 나타나고 벽을 막은 문이 부서지는 날이 오고야 만 것이다. 시간시나라는 이름의 마을, 즉 앨런의 고향에 나타난 거인이 문을 부수자마자 벽 외곽을 배회하던 다른 거인들이 난입해 사람들을 잡아먹기 시작한다. 앨런은 이날 어머니를 잃는다.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스틸컷
ⓒ MBS
애니 속 엿보이는 현실의 문제들

"그렇겠지, 분명 이 벽 안이 앞으로도 영원히 안전하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람은 머리가 어떻게 됐다고 생각해. 백 년 동안 벽이 무너지지 않았다고 해서 오늘 무너지지 않으리란 법은 어디에도 없는데."

모두 25편으로 구성된 1기는 시간시나의 함락과 앨런과 그 친구들의 군대 입대, 훈련 끝에 거인과 싸울 군인으로 길러진 이들의 활약, 인류의 남은 영토를 지키려는 저항, 벽 바깥으로 나아가는 인류의 도전과 역습까지의 이야기를 긴박감 넘치게 그려낸다. 무려 100년 동안 깨어지지 않았던 벽이 허망할 만큼 쉽게 허물어지고, 그로부터 인류의 안녕이 박살나는 모습이 참담하게 그려진다.

1기를 보며 현실 속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는 건 자연스런 귀결이다. 인간과 거인의 싸움이라는 다분히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그러나 현실에 뿌리내린 채 쓰인 인간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세상과 교감해 뻗쳐낸 상상이 곧 이야기가 됐고, 그 이야기로부터 관객은 현실을 읽어낼 상징을 접하게 마련이다. 무너지지 않을 듯했던 벽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진 직후의 공포와 혼란은 오늘의 인류에게 더욱 남다를 밖에 없다. 오랜 기간 벽 바깥의 위협이라며 별 관심 갖지 않았던 거인의 존재처럼, 또 다른 위협이 우리의 코앞에 실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스틸컷
ⓒ MBS
고통을 각오하고 벽 밖으로 나아갈 용기

환경과 생태, 무너지는 지구의 질서가 인류의 안녕을 위협한다. 지난 100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호기롭게 떠드는 우리들 앞에 지옥도가 펼쳐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악착같이 벽 바깥으로 나아가 대항할 길을 찾던 조사병단과 같은 존재가 우리 가운데 얼마나 있는가를 떠올린다. 에너지 사용을 줄이지도, 발전방식을 변화하지도 않은 채로 인류는 더 많은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만이 진보라고 말한다. 당면한 위기와 관계없이 오늘의 평안만을 고집한다.

미래를 내다보는 이들은 필멸의 미래가 펼쳐지리라고 경고한다. '운명의 날 시계'는 종말이 불과 90초 앞으로 다가왔다 말한다. 반세기 넘게 이어져온 이 시계의 역사 가운데 가장 자정에 가까운 때다. 이대로라면 벽은 무너진다. 종말이다.

'백 년 동안 무너지지 않았다 해서 오늘 무너지지 말란 법이 없다'는 주인공 앨런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지금까지 무탈했다 해서 오늘도 무탈하란 법은 없다. 죽음을 각오하고 벽 바깥으로 나갈 용기, 피를 볼지라도 문제와 마주해 싸워나갈 각오가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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