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한 통이 마지막, 아들의 행방을 찾는 엄마
제 21회 EBS 국제다큐영화제가 8월 19일부터 25일까지 열립니다. 32개국 53편에 달하는 다큐멘터리 작품 중 눈에 띄는 다큐를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조영준 기자]
▲ 제21회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증발된 사람들> 스틸컷 |
ⓒ EBS국제다큐영화제 |
01.
일본 어느 도시의 어두운 밤 골목. 작은 승합차에 타고 있는 두 여자가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여자친구가 씻으러 들어가면 몰래 내려오기로 했다는 남자다. 모습을 드러낸 그는 차에 오르자마자 씩씩한 인사를 건네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차가운 대답이다.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남자는 표정이 없는 동의를 하고는 불안한 듯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그는 지금 마음의 병으로 인해 자신의 일상을 감시하고 옥죄었던 여자친구로부터 탈출하는 중이다. 두 사람이 함께 해왔던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증발한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해마다 일본에서는 8만 여 건의 실종 신고가 접수된다고 한다. 이들 중 대부분은 돌아오지만 수천 명은 그대로 자취를 감추기도 한다. 자발적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 일본에서는 그들을 '조하쓰(蒸発)', 또는 '증발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불우한 가정환경, 직장 내에서의 불균형한 인간관계, 사업의 어려움으로 인한 금전 문제 등 이들이 자신의 삶을 버려야만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한 가지 공통적인 부분은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현재의 전부를 뒤로하고 떠난다는 사실이다.
▲ 제21회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증발된 사람들> 스틸컷 |
ⓒ EBS국제다큐영화제 |
이 작품에는 몇 명의 '증발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모두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배치된다. 영화의 처음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들이 사라지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실종자들을 보면 사실 떠나고 싶진 않았지만 사라져야만 했던 사람, 정말 실종되고 싶어서 모습을 감춘 사람 등 각자의 사정에 따라 그 경우가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일본 사회에서는 가정이나 학교, 직장에서 문제가 생기면 수치스럽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두 감독은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스기모토씨는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 내려온 회사를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고향에서는 제법 유명한 회사였다. 그런데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여기저기 빚을 지게 되었다. 5억 엔(한화 약 45억 원)이 넘어갈 때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텅 빈 느낌마저 들었다. 가족과 직원들에게 미안하고 기다려달라는 편지만 남기고 혼자 떨어져 나온 이유다. 가문의 수치라는 생각에 생명보험을 떠올리고 나쁜 생각을 했지만 실행한 용기는 없어 택한 차선이었다. 평소처럼 양복을 입고 출장을 가는 것처럼 집을 떠나온 그는 자신이 자신이 아닌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 방황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남자는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야쿠자 사무실에서 전화 업무로 일을 시작했다가 빌린 돈을 갚지 못해 무작정 배에 올랐다. 집으로 수금하러 찾아오겠다는 야쿠자의 연락에 필사적으로 도망친 것이다. 그날 이후로 그는 증발된 사람이 되었다. 이쪽 세계에서 아직 살아있기는 하지만 원래의 세상에서는 잊힌 존재인 셈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는 증발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없다. 그저 먹고 잘 수 있는 곳을 찾아 여기저기 전전하며 매일 살아갈 뿐이다.
나이트 무버의 도움으로 숙식이 해결가능한 러브호텔에서 일하며 숨죽이며 살고 있는 두 남녀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좋은 선배라고 믿고 있었던 선배의 권유로 입사한 회사에서 갈취와 협박을 당하고 사생활도 거의 없는 노예와도 같은 생활을 하다 몰래 도망쳐 왔다. 소위 말하는 블랙 기업이었다. 여자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는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던 삶에서 유일하게 믿고 있던 사장으로부터 야쿠자에게 넘겨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두 사람 모두 도망치면 다행, 붙잡히면 죽어버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현재에 다다르게 된 셈이다.
03.
"이제야 지하 깊은 곳에서 나와 조금은 볕이 드는 동굴까지 올라온 기분이에요. 아직은 좀 어둡지만요."
자신이 원래 머물고 있었던 세상을 떠나온 이들의 처음 이야기는 그들의 선택에 대한 수긍을 이끌어낸다. 물론 그들이 선택한 현재의 모습이 좋은 상황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야쿠자에 쫓겨 배에 올랐던 남자는 오사카의 슬럼가로 알려진 '니시나리'의 한 평 남짓된 쪽방에서 남은 생을 이어가고 있고, 회사의 경영난으로 빚더미에 오른 스기모토씨는 친형의 추적으로 인해 아내와 가족들에게 자신의 초라하고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러브모텔에서 일하고 있는 두 사람 역시 제대로 된 삶을 누리지는 못한 채 여전히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볕이 드는 동굴까지 올라온 기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반대로 과거의 현실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유추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다큐멘터리의 첫 장면에 등장했던 사이타씨의 야반도주 서비스 TSC는 '증발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사업으로 인식된다. 처음 시작은 1990년대 버블경제 붕괴로 많은 사람들이 빚더미에 앉았을 때였다고 한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당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어려운 현실과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조하쓰'가 되고자 했고, 이때 나이트 무버들의 도움을 받았다.
▲ 제21회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증발된 사람들> 스틸컷 |
ⓒ EBS국제다큐영화제 |
"본인이 아니면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꽤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탓에 한번 증발된 사람을 다시 찾아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문제는 남겨진 이들이다. 한순간에 자신의 곁에서 소중한 사람을 상실하게 된 연인, 가족, 친구 등의 존재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그를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없다. 이는 작품이 후반에 이르러, 증발되고자 했던 이들이 떠난 자리와 그런 결심을 한 이들의 마음 깊은 곳의 작은 떨림을 포착하고자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고야의 회사 사택에서 갑자기 사라진 남자, 26세 청년 가즈키씨의 부모도 그중 하나다.
아들의 회사 동료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이 마지막이었던 아들의 알 수 없는 행방 앞에서 어머니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은행에서도 통신사에서도 개인정보보호라는 이유로 아들의 행적을 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경찰서에서도 본인과 연락이 되어야 알려줄 수 있다는 형식적인 말만 반복한다.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여서 찾았는데 연락이 되어야 한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 아들이 왜 가족의 품을 떠나야 했는지 알 수 없는 것도 혼란스럽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추적할 수 없고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 훨씬 더 답답할 따름이다. 지금 가족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옛 연락처로 이따금씩 문자를 보내는 것이다. 물론 확인 여부는 알 수 없다.
떠나와야만 했던 자리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련은 남겨진 이들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떠나온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두고 와야 했던 이들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짙게 남는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자 하는 누군가. 자신이 잃어왔던 것들을 언젠가는 조금씩 채워나가고 싶어 하는 이들의 마음이 바로 그 증거다. 우리 모두는 하룻밤 사이에 흔적을 정리하는 일로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 보이지 않을 뿐이다.
야쿠자들의 협박으로부터 필사적으로 탈출했다던 한 남자. 오사카의 슬럼가에서 20년이 넘게 생활해 온 남자가 긴 도피 생활 끝에 고향을 방문하는 장면으로 이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늙고 병든 어머니가 혼자 살고 있는 낡고 작은 집을 배경으로 오랜 시간 서로의 안부를 전할 수 없었던 모자(母子)의 목소리가 화면을 메운다. 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진짜 메시지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에 대한 고찰과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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