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트럼프·푸틴의 '오른쪽'에 서다
프랑스 철학자 그농의 전통주의 사상에 영향
현대를 타락시대로 규정하고 과거 회귀 꿈꿔
반이민주의·내셔널리즘…세 확장하는 극우
‘영원의 전쟁’은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한 그의 참모 스티브 배넌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고문 알렉산드르 두긴이 어떤 인물인지 분석한 책이다. 글쓴이 벤저민 타이텔바움 콜로라도대 부교수는 배넌과 두긴을 통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반이민주의와 민족주의(내셔널리즘)를 앞세운 극우 세력이 득세하는 배경을 분석한다. 타이텔바움 교수는 오랜 시간에 걸쳐 직접 배넌과 두긴을 만나 인터뷰도 하고 이들이 참여하는 모임에도 어울리면서 입체적으로 두 인물을 분석한다.
책은 모두 22개 장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장은 타이텔바움 교수가 2018년 6월 뉴욕의 한 고급 호텔에서 한 배넌과의 인터뷰에서 던진 질문으로 시작한다. "당신은 전통주의자입니까?" 배넌은 오프더레코드(비보도)로 인터뷰를 하자며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전통주의자가 현 체제에 대한 불만을 가진 사람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타이텔바움 교수는 전통주의자가 오래된 문화를 선호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예전의 삶이 훨신 더 괜찮았다면서 요즘 세태를 비판하는 사람들이며 이들은 현대성(Modernity)에 반대한다. 현대성은 유럽 대륙의 사회적 삶의 방식이 세계를 장악하게 된 현상을 뜻하며 1800년대 이후 나타나기 시작했다. 타이텔바움 교수는 이러한 현대화는 곧 공적 종교가 퇴조해 이성으로 대체되며 상징적 세계가 약화되고 대신 문자적 세계가 강화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또 쉽게 수치화되고 수량화될 수 없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 영역에서 밀려나며, 영적이고 감성적이며 초자연적인 것은 뒷전이 되고 대신 물질적인 것이 앞에 나서게 된다.
전통주의는 지난 100년간 지하에서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온 철학적·영적 학파다. 전통주의의 창시자는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그농(1886~1951)인데 배넌과 두긴 모두 그농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그농은 종교적 맥락에서 개인적이고 영적인 느낌을 뜻하는 밀교를 탐구했으며 성인이 된 후 이슬람으로 개종한 인물이다. 그농의 사상은 이탈리아 남작 출신의 율리우스 에볼라(1898~1974)에게 계승됐다. 파시즘을 창시한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가 에볼라의 저술에 크게 감탄한 것으로 알려졌다.
타이텔바움 교수는 1980년의 일화를 소개하며 배넌이 전통주의자임을 증명한다. 26살 배넌이 해군에 복무할 때다. 배넌이 근무하던 폴 F 포스터 구축함이 홍콩에 정박하고 배넌은 술집으로 향하는 동료들과 떨어져 홀로 책방을 찾는다. 배넌이 이날 산 책은 그농의 저서 ‘인간 존재와 생성: 베단타학파의 지혜’였다. 배넌은 책 읽기를 즐겼다. 그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는데 당시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어 행복했다고 말한다. "하버드 광장은 내게 축복이었어. 와이드너 도서관도 있고 하버드 경영대학원 도서관도 있고. 책에 파묻혀 살았어. 원 없이 책에 영원히 파묻히고 싶었지."
배넌은 1985년 골드만삭스에 취업했고 1990년 퇴사해 자신만의 투자회사를 차린 뒤 TV 드라마 투자, 영화 제작 등으로 큰 돈을 벌었다. 부를 축적한 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독서와 영성 추구에 집중했다. 1990년대 초 배넌은 샌프란시스코 철학 교수이자 그농의 사상에 정통한 제이컵 니들먼과 교류하면서 영적 위안을 얻는다.
두긴은 1980년대 파시즘, 나치즘, 내셔널리즘, 오컬트주의, 신비주의 등의 복잡한 강령을 가진 ‘유진스키 서클’이라는 이름의 지하 사회운동 조직에서 활동했다. 당시 유진스키 클럽의 회장이 그농의 추종자였다. 두긴은 1997년 ‘지정학의 기초’라는 책을 쓰는데 이 책에서 미국의 세계 정복을 막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다. "미국의 국내 정치활동에 지정학적 혼란을 주입해야 한다. 온갖 종류의 분리주의와 민족적·사회적·인종적 갈등을 부채질해야 한다. 극단주의자, 인종주의자, 사이비 종교 단체 등 온갖 저항운동을 지원해야 한다. 그리하여 미국의 국내 정치 과정을 불안정한 상태로 빠뜨려야 한다." 타이텔바움 교수는 두긴이 ‘지정학의 기초’에서 쓴 내용이 2016년 미국 대선 과정에 러시아가 개입했다는 의혹과 무관치 않다고 설명한다.
책에는 배넌과 두긴 외에도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브라질의 극우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르 정부에서 이론가로 활약한 올라부 지 카르발류, 극우 지성주의 및 전통주의 서적을 전문으로 발행하는 영어권 출판사 악토스의 편집장을 지낸 제이슨 레자 조르자니 등이다.
이들 전통주의자들은 현대를 타락한 시대로 규정하고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며 영성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배넌은 종교와 영성에 관한 책에 심취하던 중 그농의 책을 읽었고 두긴은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정교일치 국가인 이란을 숭배한다. 카르발류는 1970년대 후반부터 전통주의에 관한 책과 그농의 책을 읽은 뒤 1980년대에는 제의 공간을 차리고 신도를 모으기도 했다.
트럼프와 보우소나르가 연임에 실패하면서 얼핏 극우 세력이 퇴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반이민 정서에 힘입어 극우 성향의 정당과 정치인들이 점점 더 세를 넓히고 있으며 트럼프도 오는 11월 대선에서 재집권을 노리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 돼버린 극우에 대한 사상적 연원을 따져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영원의 전쟁 | 벤저민 타이텔바움 지음 | 김정은 옮김 | 글항아리 | 372쪽 | 1만9800원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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