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경와인셀라]"모방을 통한 재현"…伊 스파클링 '스푸만테'의 기원

구은모 2024. 8. 23.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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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탈리아 '간치아(Gancia)'
170년 역사의 이탈리아 스파클링 선구자
1865년 최초의 伊 스파클링 '아스티 스푸만테'
한국선 '모스카토 다스티' 생산자로 이름 날려
편집자주
하늘 아래 같은 와인은 없습니다. 매년 같은 땅에서 자란 포도를 이용해 같은 방식으로 양조하고 숙성하더라도 매번 다른 결과물과 마주하게 됩니다. 와인은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우연의 술'입니다. 단 한 번의 강렬한 기억만 남긴 채 말없이 사라지는 와인은 하나같이 흥미로운 사연을 품고 있습니다. '아경와인셀라'는 저마다 다른 사정에 따라 빚어지고 익어가는 와인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내 들려 드립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시학(Poetics)」에서 인간은 '모방(imitation)'을 통해 '재현(representation)'하려는 본성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모방은 단순히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베낀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연 또는 자연의 창작물로부터 영감을 받거나 그것을 토대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 가깝다. 이러한 재현을 통해 비로소 예술의 창작, 창조가 시작된다.

간치아의 카넬리(Canelli) 포도밭 전경.

스파클링 와인에도 모방과 재현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이뤄낸 이야기가 있다. 스파클링 와인을 이야기할 때면 대부분 프랑스의 '샴페인(Champagne)'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샴페인은 예나 지금이나 최고급 스파클링 와인의 대명사로 여겨지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샴페인이 왕좌를 차지했다고, 다른 스파클링 와인이 모두 샴페인보다 열위에 있다고 볼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특히 요즘처럼 무더운 날이면 차갑게 칠링돼 신선한 향과 상큼한 맛으로 뜨거워진 몸의 열기를 식혀 주는 이탈리아의 스파클링 와인을 샴페인보다 먼저 떠올리는 와인 애호가가 많다.

이탈리아 스파클링 와인의 기원이 되는 와이너리는 '간치아(Gancia)'다. 시작은 샴페인의 모방이고 재현이었지만 종국엔 이탈리아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이탈리아 스파클링 와인 '스푸만테(Spumante)'의 역사에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기념비적인 와이너리다.

피에몬테서 재현한 샴페인…최초의 스푸만테 되다

(왼쪽부터)간치아의 설립자인 '카를로 간치아(Carlo Gancia)'와 1850년 설립 당시 와이너리 건물 전경.

1829년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나르졸레(Narzole)에서 태어난 카를로 간치아(Carlo Gancia)는 스무 살이 채 되기 전인 1848년 샴페인 생산의 중심지 랭스(Reims)로 유학을 떠난다. 랭스의 샴페인 하우스에서 일하며 전통적인 샴페인 제조방식(Traditional Method, Methode Champenoise)을 체계적으로 배운 그는 1850년 피에몬테로 돌아와 형제인 에두아르도(Edouardo Gancia)와 '프라텔리 간치아(Fratelli Gancia)'를 설립하게 된다.

카를로는 프랑스에서 배워 온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양질의 스파클링 와인 양조에 나섰지만 당시 피에몬테에는 샴페인을 만드는 주요 품종인 피노 누아(Pinot Noir)와 샤르도네(Chardonnay)가 재배되고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피에몬테에서 많이 자라던 모스카토 비앙코(Moscato Bianco)였다. 모스카토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널리 재배되는 청포도 품종으로 강렬한 꽃 향과 복숭아, 배 등의 풍미가 특징으로 '머스캣(Muscat)'이라고도 불린다.

이탈리아 피에몬테의 와인 생산지. 가운데 녹색 지역이 모스카토 품종의 주요 생산지인 '아스티(Asti)'다.

간치아는 모스카토를 주재료로 삼아 샴페인과 같은 2차 병 발효 방식을 사용해 고급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고, 오랜 실험과 공정을 개선한 끝에 1865년 최초의 이탈리아 스파클링 와인을 선보였다. 당시 '모스카토 샴페인(Moscato Champagne)'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된 이 와인은 이탈리아 최초의 2차 병 발효 방식의 스푸만테로, 이후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서 생산된 스파클링 와인에만 샴페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법적 제약이 가해지면서 '모스카토 스푸만테(Moscato Spumante)'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두 형제는 1866년 오랜 와인 생산 중심지였던 카넬리(Canelli)로 이전해 기틀을 다졌고, 현재까지 이 지역을 중심으로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이후 간치아는 높은 품질을 토대로 1870년 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II)로부터 왕실의 공식 와인 공급처로 지정되며 '국왕의 와인 공급자(Provveditori di Sua Maest? il Re)'라는 칭호를 얻었고, 1873년 오스트리아 빈과 1878년 프랑스 파리 박람회 등에서 수상하며 인지도를 끌어올려 지속적인 성장세를 이어가게 된다.

샤르마 방식으로의 전환…세계로 이름 알리다

'간치아 아스티 스푸만테(Gancia Asti Spumante)'

스푸만테는 이탈리아의 스파클링 와인을 일컫는다. 정확한 표현은 탄산이 강한 이탈리아 스파클링 와인을 스푸만테, 탄산이 강하지 않은 것은 '프리잔테(Frizzante)'로 분류하지만 구분 없이 스푸만테로 통칭해 사용하기도 한다. 간치아가 처음 선보인 스푸만테는 모스카토 샴페인과 모스카토 스푸만테라는 이름을 거쳐 '아스티 스푸만테(Asti Spumante)'로 불리는 와인이다. 아스티는 피에몬테 남동부의 와인 생산지로 모스카토 품종의 주산지인데, 이 지역에서 만든 스푸만테를 아스티 스푸만테라고 부른다.

카를로가 처음 만든 아스티 스푸만테는 20세기 들어서도 인기가 이어지다,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전환점을 마주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이 지역에서 스푸만테를 즐겼던 미군들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인데, 이로 인해 아스티 스푸만테 생산자들은 급격하게 증가한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기존의 2차 병 발효 방식 대신 대량생산이 가능한 샤르마 방식(Charmat Method)으로 생산방식을 변경하게 된다.

샤르마 방식은 1895년 아스티의 와인메이커였던 페데리코 마르티노띠(Federico Martinotti)가 처음 개발해 특허받은 기술이다. 1907년 프랑스의 외젠 샤르마(Eugene Charmat)가 개선해 새롭게 특허를 받으면서 현재는 샤르마 방식 또는 탱크 방식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샤르마 방식은 병에서 2차 발효를 진행하던 샴페인 방식과 다르게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탄산가스 발효를 통해 2차 발효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간치아의 지하 와인셀러 전경.

샤르마 방식에 따라 스테인리스 탱크에 베이스 와인을 넣고 효모와 당분과 첨가하면 가압 탱크에서 저온으로 2차 탄산가스 발효가 일어나면서 기포가 발생한다. 이때 생성된 이산화탄소는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탱크 안에서 와인에 용해되는데, 탄산가스의 발효 기간은 품질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발효 기간이 길면 와인의 아로마를 더 잘 보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미세하고 지속력이 좋은 버블을 얻을 수 있다. 탄산가스 발효가 끝나면 효모는 여과 작업을 거쳐 제거한 뒤 이산화탄소가 용해된 와인을 병입하게 된다. 다만 일반적인 샤르마 방식과 다르게 아스티 스푸만테는 베이스 와인 대신 포도즙을 넣어 발효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고, 이를 아스티 방식(Asti Method)이라고 부른다.

아스티 스푸만테는 생산방식의 변화와 함께 명칭에서도 변화를 겪는다. 1993년 아스티 지역이 이탈리아 와인의 등급체계인 DOC법에서 규정하는 최고등급인 DOCG로 승격되면서 스푸만테라는 단어를 떼고 '아스티(Asti DOCG)'라는 원산지 명칭을 와인에 사용하게 된다. 명칭 변경에 따라 스푸만테를 이름에서 떼어 낸 '간치아 아스티 DOCG(Gancia Asti)'는 현재도 간치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매출 점유율을 차지하는 와이너리의 대표 와인이다. 알코올 도수 7.5도(%)의 간치아 아스티는 볏짚과 연한 금빛 색상에 향긋한 꽃 계열의 향과 오렌지, 달콤한 꿀향이 섬세하게 펼쳐지며 달콤한 아로마가 상쾌하고 기분 좋은 미감으로 마무리되는 세미 스위트 스파클링 와인이다.

익숙하지만 여전히 달콤한 이름 '모스카토 다스티'

'간치아 모스카토 다스티(Gancia Moscato D'Asti)'

아스티와 간치아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린 건 아스티 스푸만테지만 한국인들에게 가장 익숙하고 유명한 아스티는 단연 '모스카토 다스티(Moscato D'Asti)'다. 아스티 지역의 모스카토라는 뜻의 모스카토 다스티는 약발포성 와인인 프리잔테로 한국 밖에서도 와인을 처음 시작하는 초보자에게 큰 인기를 누리는 와인이기도 하다.

모스카토 다스티는 가볍고 달콤하며 풍성한 아로마가 돋보이는 와인으로 DOC법에 따라 탄산가스의 압력이 2.5기압(atm)을 초과해선 안 된다. 이러한 약발포성 와인이기 때문에 아로마나 탄산의 강도 등에서 보통 4기압 이상인 아스티 스푸만테와 비교해 강하지 않고 부드러우며 알코올 도수 역시 최소 4.5%에서 최대 6.5%로 높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과실향과 꽃향 등 방향성이 뛰어나고 달콤한 맛으로 인해 디저트 와인으로도 인기가 높다.

'간치아 프로세코(Gancia Prosecco)'

한국에선 모스카토 다스티에 미치지 못하지만 이탈리아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판매량을 보이는 간치아의 와인은 '간치아 프로세코(Gancia Prosecco)'로 스파클링 와인 매출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실제로 판매량이나 선호도 측면에서 최고의 스푸만테 자리는 프로세코가 차지하고 있다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프로세코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고 가장 사랑받는 스푸만테로 북동부 베네토(Veneto)와 프리울리-베네치아 줄리아(Friuli-Venezia Giulia) 주에서 생산된다. 프로세코는 가벼운 사과와 멜론 풍미를 지닌 청포도 품종 글레라(Glera)를 85% 이상 사용돼야 하며, 스테인리스 탱크에서 샤르마 방식으로 양조돼 신선한 과일맛이 명확하게 살아있는 깔끔한 스타일이 특징이다. 또한 프로세코는 달콤한 모스카토 다스티와는 다르게 단맛이 거의 없는 드라이한 스타일로 만들어진다.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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