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오늘도 동그라미를 그리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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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가량 지속하고 있는 일종의 아침 루틴이 있다.
안타깝게도 내가 루틴을 실천할 수 있는 시간은 이른 아침뿐이다.
2000년부터 지난 3월까지 23년간 매일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가수 겸 배우 김창완이 에세이집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오롯이 새날을 맞이하고 또 한 번의 루틴을 수행하며 오늘의 동그라미를 그리는 게 지금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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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가량 지속하고 있는 일종의 아침 루틴이 있다. 잠에서 깨 눈을 뜨면 온 집안의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연다. 거실 베란다 창가에 있는 바질 화분에 물을 준다. 전기 포트에 물을 끓여 따끈하게 한잔 마신 뒤 간단한 스트레칭을 한다. 사과 반 개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입에 물고 다니면서 어수선한 집안을 대강 정리한다.
이런 규칙을 만들게 된 건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나서다. 영화에서 도쿄의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야쿠쇼 고지)는 매일 새벽 환경미화원이 골목을 빗자루질하는 소리에 눈뜬다. 이불을 갠 다음 화분에 물을 주고 양치질과 면도를 하고 나서 옷을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 집 앞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들고 카세트테이프로 오래된 팝송을 들으며 출근한다. 점심으론 나무 그늘 아래서 샌드위치를 먹는다. 잠시 쉬는 시간엔 흑백 필름 카메라로 나무 사진을 한 장씩 찍는 일도 잊지 않는다. 퇴근 후에는 대중목욕탕에서 씻고 단골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는다. 나는 아마도 히라야마의 모습에 감화를 받은 듯하다. 히라야마는 모든 날, 하루 종일 같은 순서의 일과를 반복한다.
안타깝게도 내가 루틴을 실천할 수 있는 시간은 이른 아침뿐이다. 놀라운 점은 하루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무언가 꾸준히 한다는 것에 일종의 성취감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그럴듯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도,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루틴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민망한, 누구나 하는 사소한 행동들이다. 수행자처럼 같은 일을 반복하는 히라야마에게도 완전히 똑같은 하루는 없다. 늘 만족스러운 날일 수도 없다. 하지만 “그림자도 겹치면 짙어진다”는 히라야마의 말처럼 착실하게 쌓인 하루하루는 그의 삶을 단단하게 받쳐준다.
2000년부터 지난 3월까지 23년간 매일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가수 겸 배우 김창완이 에세이집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종이에 펜으로 수십 개의 동그라미를 그릴 때 반듯하고 예쁜 동그라미는 몇 개 안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모두 동그라미라고 말이다. 우리가 사는 날들 중엔 찌그러진 동그라미가 더 많을 테다. 행복에 대한 담론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건 아닐까. 저마다 꿈꾸는 이상이 다르고, 짊어진 삶의 무게가 다르다. ‘무엇이 내게 행복을 주는가’에 대해선 타인의 생각을 멋대로 재단할 수 없다. 동그라미의 모습이 조금씩 다 다른 것처럼 모두가 멋진 것, 남에게 자랑할 만한 것에만 행복의 가치를 둘 필요는 없다.
오는 28일 개봉하는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절망에 대처하는 요즘 청년들의 모습을 다룬다. 주인공 계나(고아성)는 “행복은 너무 과대평가된 단어인 것 같아. 나는 배고프고 춥지만 않으면 행복하거든”이라고 말한다. 영화를 연출한 장건재 감독은 “한국 사회는 각자 위치에서 저마다의 지옥을 품고 살아가는 사회”라면서 “사람들은 아주 좋고 거대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고, 그런 행복을 위해 어떤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을 묻자 김창완은 “매일매일을 실제로 새로 태어나는 것처럼 맞는다는 게 중요하다”면서 “새날을 새날답지 않게, 마치 어제가 남긴 찌꺼기같이 맞을 수도 있다”고 답했다. ‘어제가 남긴 찌꺼기 같은 하루’라니. 그 말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인생은 늘 앞통수가 아니라 뒤통수를 후려친다. 괴로움은 ‘이제 갔나’ 싶으면 슬그머니 또 옆에 와 있다. 오롯이 새날을 맞이하고 또 한 번의 루틴을 수행하며 오늘의 동그라미를 그리는 게 지금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일지 모른다. 좀 찌그러지면 뭐 어떤가.
임세정 문화체육부 차장 fish81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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