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의 퍼스펙티브] 정보 요원 기본 원칙 안 지키고 사전 경고 놓친 게 화근

2024. 8. 23.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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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대북전문가 수미 테리 기소 사건의 시사점〉

장석광 전 국가정보대학원 교수

국가정보원에 근무하던 1990년대 후반 미국 연방수사국(FBI)에서 위탁 교육을 받을 때였다. 세계 각국에서 온 교육생들이 자국의 전통 의상과 음식·춤 등을 소개하는 국제친선의 날(International Day) 행사가 열렸다. 필자는 대사관의 도움으로 잡채·식혜와 홍보 책자를 전시했다. FBI는 그날도 워싱턴DC 한국 대사관부터 버지니아 콴티코의 FBI 내셔널 아카데미까지 국정원 요원의 뒤를 따라붙었다.


국정원 요원 따라붙은 FBI

대사관에 근무하던 국정원 후배는 “처음에는 많이 거슬렸는데 지금은 으레 그러려니 한다”고 했다. 심포지엄·콘퍼런스·의회·관공서·파티장·식당 등 도처에서 공개·비공개 행사를 가리지 않고 국정원 요원이 움직이는 곳이면 어디든 FBI 요원이 나타났다. 서울에서 손님이 오는 날엔 드러내놓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찍으려면 찍어라. 내가 미국의 기밀을 훔치는 것도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상인·예술인·회사원 같은 일반인으로 위장한 정보 요원을 ‘블랙’이라고 한다면, 외교관 신분으로 공식 파견된 정보 요원은 ‘화이트’라고 불린다. 외교부에서 보낸 외교관이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외교활동을 하는 데 비해 정보기관에서 파견한 화이트는 공식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국가 간 현안을 물밑에서 협상하고 전문성이 필요한 정보 수집 활동을 한다. 해당 국가에서도 화이트의 신분을 인지하고 있지만, 이들의 정보활동을 묵시적으로 허용한다. 그들의 활동이 ‘선을 넘는다’고 판단해도 대개 물밑에서 외교적 수단으로 해결한다. 정보활동에 대한 상호성의 원칙, 국제적 관행이다.


화이트 요원 교류한 테리 기소

지난달 공개된 수미 테리의 공소장엔 국가정보원 요원이 차 안에서 찍은 테리의 ‘블링컨 국무장관 회의 메모’ 사진이 들어있다. 미 연방수사국(FBI)의 사진 입수 경로에 따라 국내·외적 파장이 우려된다. 수미 테리 공소장 캡처

지난달 15일 미국 연방 검찰 뉴욕남부지검이 미 중앙정보국(CIA) 분석관 출신 대북 전문가 수미 테리(52)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을 ‘외국대리인등록법(Foreign Agents Registration Act·약칭 FARA)’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국내 언론들은 ‘국정원의 정보활동이 탈탈 털렸다’고 보도했다. 정보의 세계에선 황당하다면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공소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수미 테리는 10년 넘게 한국 정보기관의 지시를 받아 유력 언론에 기사를 게재하고 싱크탱크에서 콘퍼런스를 조직했다. 한국 정보 요원들이 워싱턴DC의 주요 인사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네트워킹 행사도 주선했다. 그 대가로 루이비통과 보테가베네타 핸드백, 돌체앤가바나 코트와 최소 3만7000달러의 뒷돈을 받았다.’
31페이지 분량의 공소장이지만 법적으로 문제 되는 부분은 의외로 단순하다. ‘수미 테리가외국대리인등록법에서 규정하는 외국 대리인으로 활동하면서 등록하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미 당국의 테리 경고 몰랐나

수미 테리 공소장에 첨부된 사진들중 테리와 국정원 직원 회동. 수미 테리 공소장 캡처

공소장에는 테리와 국정원 요원(화이트)들과의 회동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맨해튼의 고급 식당에서 테리와 국정원 요원들이 식사하는 모습, 국정원 요원이 워싱턴DC 근교의 고급 매장에서 핸드백을 사는 장면을 사진으로 첨부했다. 수사의 핵심이 ‘스파이 혐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소장은 마치 첩보영화처럼 묘사돼 있다.

이 단계에서 드는 의문점 두 가지. 하나, 국정원 요원들은 테리에 대한 FBI의 10년 추적을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둘, 미국 검찰은 왜 하필 한미동맹이 순항하고 있는 이 시점에 한국을 난처하게 만드는 기소를 했을까 하는 것이다.
화이트는 공개된 스파이다. 화이트의 정보활동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화이트의 활동에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화이트들은 테리와의 접촉을 비밀공작이 아닌 일상적 정보활동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국정원이 탈탈 털린 것이 아니라 FBI와 미국 검찰이 정보 세계의 관행을 실정법으로 재단했다고 보인다.
테리가 기소된 시점과 비슷한 시기에 외국대리인등록법 위반으로 기소됐던 미국 민주당 소속 밥 메넨데스 상원의원이 배심원들로부터 유죄 평결을 받았다. 2021년 바이든 대통령의 지명으로 흑인 최초로 뉴욕남부지검장에 오른 데미안 윌리엄스가 지난해 9월 메넨데스 의원을 재판에 넘겼다. 동맹국인 이집트로부터 현금과 명품을 받고 고급 식당에서 접대를 받은 메넨데스의 유죄 평결 흐름이 유사한 혐의를 받는 테리에 대한 기소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뇌물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미국 민주당 소속 밥 메넨데스 연방상원의원(뉴저지)에게 유죄 평결이 내려졌다고 뉴욕타임스(NYT) 등 미 매체들이 7월 1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사진은 발언하는 메넨데스의 모습. 연합뉴스

「 국정원의 수미 테리 교류는 비밀공작 아닌 일상적 정보활동
정보 세계의 관행을 실정법으로 재단…미 대선 앞두고 초강수
‘닭의 목을 쳐 원숭이에 경고’하듯 러시아·중국 의식했을 수도
최고 정보자산인 700만 재외동포 정부의 테리 대응 주시할듯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 개입하려는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경고 메시지라는 해석도 있다. 윌리엄스는 테리의 기소를 “공공정책 종사자들이 외국 정부에게 자신의 전문지식을 팔고 싶을 땐 법을 다시 생각하고 준수해야 한다는 명확한 메시지”라고 말했다. 살계경후(殺鷄儆猴). 닭의 목을 쳐 그 공포로써 원숭이를 길들인다는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이다.
공소장은 피고인에게 불리한 내용으로 채워지기 마련이며 아직은 혐의일 뿐이다. 공소장과 테리의 주장을 중심으로 향후 법정에서 다툼이 될 부분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테리측은 “싱크탱크 학자의 활동기준(standard activity)에 맞게 활동했다.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 대리인으로 등록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싱크탱크의 행사는 공공외교 차원에서 열렸으며 청탁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국정원 직원들을 위한 네트워킹 행사 주선도 워싱턴DC의 통상적인 행사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면서 “언론 기고 역시 그동안 공개적으로 주장해온 정책적 견해에서 벗어난 것은 없었다”고 항변한다. 공소장에 의하면 테리가 국정원 정보원으로 10년간 활동하면서 받은 건 핸드백 두 개, 코트 한 개, 3만7000 달러 상당의 돈이 전부다. 미국 검찰은 테리의 정보활동과 금품의 대가 관계를 입증해야 한다.


메넨데스 의원 기소 주시했어야


이번 사건에서 드러나는 국정원의 가장 큰 실책은 미국의 방첩 전략 변화를 간과했을 가능성이다. 미국은 2016년 대선 이후 러시아와 중국이 선거 개입과 입법 로비의 방법으로 미국 사회와 정치에 영향력을 미치려는 것을 큰 위협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2월 미국 상원은 외국대리인등록법 개정안을 발의했고, 9월엔 메넨데스 의원을 기소했다. 이와 관련해 당시 국정원이 어떤 분석을 했는지 의문이다.
국정원의 안이한 해외 정보활동도 문제다. 국정원이 정보활동을 너무 가볍게 생각한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테리가 제공한 협조나 정보의 내용이 과연 외교부나 공식 정보협력 채널을 통해선 획득하기 어려운 수준의 자료였는지 솔직하게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정보요원 ‘모스크바 원칙’ 어겨


수미 테리 연구원이 2017년 6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행사에서 한반도 문제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부인하기 어려운 부분은 국정원이 정보활동의 기본 원칙에 소홀했다는 대목이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우방국은 있어도 우호적인 정보기관은 없다”고 했다. 우리나라에도 적용되는 얘기다. 냉전 시대 목숨을 걸고 모스크바에 부임하는 CIA 요원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비전된 룰을 ‘모스크바 원칙(The Moscow Rules)’이라고 한다. 여기에 ‘상대 정보기관을 자극해선 안 된다(Don’t harass the opposition)‘는 항목이 있다. 우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의도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상대 기관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것은 금물이다. 테리의 적법성 여부를 떠나 공소장을 보면 테리에게 여러 차례 경고가 있었고 그 경고는 국정원 요원의 귀에도 들어갔을 개연성이 적지 않다. 국정원은 그 경고를 놓쳤다. 우방에 대한 지나친 믿음, 비밀 정보활동이 아니라는 과도한 자신감이 테리가 기소를 당하고 국정원의 정보활동이 탈탈 털린 배경이었는지 모른다.
우려스러운 점은 국정원에서 정보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정치권이 정쟁으로 몰아가는 구태다. 이번 역시 사건 직후 대통령실은 “지난 정권에서 발생한 일”이라며 “감찰·문책 검토”로 대응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요원은 본부의 훈령에 따라 움직인다.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본부에서 하달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요원을 정치적 잣대로만 평가하는 방식은 더 큰 ’정보사고‘를 부를 수 있다.
자칫 간과하기 쉬운 부분도 있다. 테리는 저명한 싱크탱크의 대북 전문가다. 여느 성공한 전문가처럼 테리도 최신 정보를 얻기 위해 많은 출처와 접촉한다. 미국 관리뿐 아니라 한국 공무원과도 긴밀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테리는 미국의 기밀을 누설하지 않았다. 미국을 배반한 것도 아니다. 테리의 1심 판결은 일러야 내년인데, 미국 대선은 몇 달 남지 않았다. 테리가 무죄를 받는다 해도 미국은 이미 살계경후의 효과를 거두었다. 테리의 불순하지 않은 의도와 활동은 미국이나 한국에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다.
사법적 처벌 여부를 떠나 한국계 미국인인 테리는 이번 기소로 많은 것을 잃었다. 실직 고통에 막대한 변호사 비용도 부담이다. 대한민국 해외 정보활동의 앞날은 우리 정부가 테리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최고 정보기관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이스라엘 모사드의 최고 정보자산은 세계에 산재한 유대인이다. 700만 재외동포가 지금 국정원과 우리 정부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장석광 전 국가정보대학원 교수

장석광 전 국가정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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