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40개국 여행한 아빠,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오영식 2024. 8. 22.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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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육아'의 행복을 만끽하며 2년 뒤엔 미국 여행에 나설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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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식 기자]

▲ 세계여행 출발 직전 여행 출발 직전 아들이 다니는 화순 제일초등학교에서 찍은 기념사진
ⓒ 오영식
나는 20년간 기상청, 국토부, 환경부 등 국가기관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1년여 전, 43세란 젊은 나이에 퇴직했다. 그리고 9살 아들과 한국에서 타던 자동차를 러시아로 가져가 40개국을 여행하고 돌아왔다(관련 연재기사 '아들 손 잡고 세계여행' 보기: https://omn.kr/26msn ).

국가공무원 퇴직 후 아들과 떠난 세계여행

내가 떠날 때 많은 사람들은 부러움과 함께 뒤돌아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육아휴직만 하고 여행 갔다가 다시 복직하지 그래?"
"그동안 돈 모아놓은 게 많은가 보네? 로또에 당첨됐어? 아니면 주식 했어?"

어차피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육아휴직을 쓸 수 있었으니, 동료들 말처럼 그냥 여행하며 머리 식히고 돌아와 다시 복직을 할 수도 있었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올라간 직후 아이 엄마와 이혼해 싱글대디로 아들을 혼자 키우고 있긴 하지만, 공무원들은 육아 중인 부모를 위한 다양한 복무제도가 있어 복직 후 아이를 키우며 근무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국가공무원 재직 시절, 국가 방재기관은 비상근무가 자주 있다 강수량계 점검, 3~4명의 인원이 100여 개의 장비를 점검해야 했다.
ⓒ 오영식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가 근무하던 기관은 1년 내내 당직과 비상근무가 잦은 곳이었다. 아들을 혼자 키우는 나는 당시 8살이던 아들이 잠들었을 때 혼자 사무실에 출근해 비상근무를 서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한 지역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국민의 안전이 위험한 상황이라면 당연히 이해될 텐데, 아주 먼 지역에 호우주의보 하나 났다고 1시간 이내에 여러 명이 동시에 비상근무로 출근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비상근무'라는 용어와는 어울리지 않게 서둘러 가보면 대부분은 하는 일 없이 인터넷 보며 시간 보내다 퇴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그런 모습을 보며 미련 없이 사직서를 던지고 아들과 여행을 떠났다. 그때 나는 속으로 다짐을 했었다.

'그래도 소위 '잘나간다'던 국가공무원 신분을 이렇게 일찍 내려놓는데, 어영부영 대충 살지는 말자!'

더 구체적인 계획도 세웠다.

'아들이 고등학교에 가기 전 아들과 함께 6대륙 100개국 정도는 여행해 보자.'

아빠는 스페인어, 아들은 영어 배우기

그렇게 우리 부자는 자동차 타고 3대륙, 40개국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아직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은 학업과 학교 적응 문제로 인해 매년 오랜 기간 여행을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지금 아들은 영어를, 나는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고, 2년 뒤 우리는 다시 미국으로, 북아메리카부터 남아메리카까지 종단하는 장기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최근 나는 생활비를 벌 요량으로 아들이 다니는 학교 앞에서 영어학원을 차려 오후에는 아들과 또래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퇴직하고 아들 학교 앞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

지금 있는 학원 2층 발코니에서는 아들이 다니는 학교 정문이 내려다보인다. 그렇게 나는 요즘 학교에서 끝나는 시간이 되면 저 멀리 쫄래쫄래 걸어오는 아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다른 학원생처럼 아들은 나를 똑같이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만, 다른 원생이 보지 않을 때는 서로에게 개다리춤을 추며 장난을 치는 '꿈만 같은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 학원 발코니에서 본 풍경 아들이 학교에서 걸어오는 걸 매일 볼 수 있다
ⓒ 오영식
아들에게 바라는 딱 두 가지 바람

나는 세계여행을 하기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까지도 아들이 '공부 잘해서 명문대에 가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물론 부모로서 제 자식이 공부를 잘하면 좋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 테니스 선수 생활을 하다 중학교 3학년이 끝나갈 무렵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부가 힘들다거나 시험을 앞두고 스트레스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들어가기 힘들다는 국가공무원 시험도 딱 두 달 공부하고 공채에 합격했고, 운동선수 생활을 하느라 '영어 포기자'로 살다 운동을 그만두고 1년 6개월 만에 수능 영어 모의고사에서 만점을 받았었다.

나이 마흔이 넘었기에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최근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소위 말해, 나는 '공부 머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내 아들은 다르다. 아들은 항상 긍정적인 성격이어서 아는 수학 문제를 하나 틀려도, 영어단어를 친구보다 많이 몰라도 항상 즐거운 아이이다. 굳이 말하면 '공부 머리'보다는 '놀이 머리'가 발달했다고 해야 할까. 공부보다 친구랑 노는 걸 훨씬 더 좋아하고 잘하는 성격을 잘 알고 있어서 나는 아들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 영어공부하는 아들 세계여행 후 아들은 영어공부를 재밌어 한다
ⓒ 오영식
그럼에도 내가 아들에게 꼭 바라는 두 가지가 있다. 그건 바로 '영어'와 '복싱'이다. 여행 중 나는 아들이 현지에서 다양한 국적의 아이와 함께 어울려 놀게 하고 싶었다.

당시 아들은 아홉 살이라 아직 영어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금방 어울려 잘 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기회가 닿으면 가능한 자주 현지 아이와 어울려 놀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들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신중한 성격이어서 그런지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와는 잘 어울리거나 놀지 못했다. 잠깐 놀더라도 나에게 계속 통역을 부탁하고 답답해하는 상황이 자주 있었다.

반면에 아들은 영어뿐만 아니라 러시아어나 스페인어 등 처음 듣는 언어를 쓰는 아이와도 항상 말이 잘 통하는 나를 부러워하곤 했다. 그렇게 아들은 다른 나라 사람과 대화할 때 중심엔 항상 '영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들은 여행 후 앞으로 아빠와 100개국을 여행하려면 영어 공부가 필수라는 걸 이제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또한 두 번째 바람을 해결하려 한 달 전 아들을 가까운 곳에 있는 복싱체육관에 데려갔다. 그래서 지금 아들은 대한민국 최초 여자 복싱 동메달리스트인 임애지 선수가 다녔던 체육관에서 복싱을 하고 있다.

아들과 세계여행을 하며 아프리카나 치안이 불안한 나라에 갈 때마다 나는 늘 불안한 마음이 들었었다. 피곤해하는 아들을 쉬게 하려고 혼자 있으라고 하곤 나 혼자 마트와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 온 적이 자주 있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생각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면 아들한테 복싱을 가르쳐야겠다.'

아들 또한 아빠가 왜 복싱을 배우라는지 잘 알고 있고, 다행히 잘 적응하고 있다.
▲ 화순 천사체육관 우리나라 여자 최초 올림픽메달리스트인 임애지 선수가 다닌 복싱체육관
ⓒ 오영식
돈을 줘도 안 바꿀 '독점육아'의 행복

우리 아들이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에 간다면? 아빠로서 나는 당연히 뿌듯하겠지만, 사실 명문대를 보내기 위해 어떻게 해서라도 성적을 올리려 학원에 보내거나 과외까지 더 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의사가 되거나 대기업, 은행 같은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면 수입도 많고 떵떵거리며 잘 살겠지만, 그 뒤엔 어떤 단점이 있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0대엔 명문대에 가기 위해 스트레스 참아가며 공부에 파묻히다 20대엔 취업 준비, 30대엔 인정받기 위해 '마라톤 같은 인생을 100m 달리기하듯' 전력 질주하는 삶. 그렇게 살다가 나중에 40대~50대가 되면, 부는 쌓았지만 주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거나 정작 자기 몸이 망가져 인생을 즐기지 못하는 분들을 나는 수도 없이 많이 보았다.

나는 아들이 공부를 조금 못해서 대학에 가지 못해도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며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현대 사회에서 여유 있고 행복한 삶을 살려면 돈은 필수라지만, 시골에선 돈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시골에선 그리 많은 연봉도, 넓고 으리으리한 아파트도 필요하지 않다.
▲ 화순천변 캠핑 시골에 살면 돈이 많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 오영식
이제 내가 공무원에서 퇴직한 지 1년 6개월 정도가 됐으니, 퇴직하지 않았다면 받았을 연봉과 아들과 여행하며 쓴 돈을 합치면 최소 1억 원은 손해를 본 셈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미래가 두렵지 않다. 욕심을 내려놓으니 하고 싶은 거 하다 망할지라도 내가 사는 시골에선 최저 시급을 받고도 아들과 둘이 사는 데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 아들과 함께 하는 여행 강연 여행강연 요청이 오면 아들과 함께 가곤 한다.
ⓒ 오영식
여행 후 돌아와 우리 부자는 함께 여행 에세이 <돼지 아빠와 원숭이 아들의 흰둥이랑 지구 한 바퀴>(2023)를 썼다. 이 책을 읽으신 분들이 요청하는 강의에 아들과 함께 강연자로 나서기도 하고, 가끔은 아들과 함께 방송에 출연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 아들은 부유하지는 않은 아빠와 살지만, 몇 안 되는 아줌마·아저씨 팬들에게 둘러싸이고 또 자기 이름을 사인도 해주는 그런 재밌는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아들이 중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남은 58개국을 더 여행하기 위해 차근차근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이미 아메리카를 여행할 시기인 2년 뒤까지는 아주 세밀하게 계획을 세워 놓았고, 그 뒤로는 계획을 조금씩 수정하며 '아들과 함께하는 인생'을 살아갈 예정이다.

물론, 과거 함께 근무했던 동료와 지인들을 어쩌다 만날 때면 나보다 후배임에도 이젠 훨씬 더 많은 수입과 승진 소식 덕에 솔직히 부러운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 삶을 바꿀 의향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아들이 자라는 시간을 온전히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아들과 함께 진행한 북콘서트 여행 후 돌아와서도 하루 일과의 대부분은 아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다.
ⓒ 오영식

덧붙이는 글 | 추후 기자 개인 블로그(blog.naver.com/james8250)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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