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총재 '부동산' 40번 넘게 말했다…집값에 발목잡힌 금리
한국은행이 22일 또다시 기준금리를 3.5%로 동결했다. 1년6개월 동안 이어진 역대 최장 13차례 연속 동결 기록이다. 최근 경기하강 움직임에 금리 인하 압박이 크지만, 치솟는 집값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긴축 기조를 유지하기로 한 것이다. 기준금리를 내리기 전에 사실상 정부에 부동산 시장 안정 선결을 주문한 것이라는 풀이가 나온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이날 회의에서 전원 일치 의견으로 기준금리를 동결했다고 밝혔다. 금통위는 “수도권 주택 가격 상승세와 가계부채 증가세가 지속하고 외환시장의 경계감도 남아 있다”며 “정부의 부동산 대책과 글로벌 위험 회피 심리 변화가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좀 더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창용 한은 총재를 제외한 금통위원 6명 중 4명이 ‘향후 3개월 내 기준금리 인하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이런 견해를 표명한 위원이 지난 7월 회의 때 2명에서 두배로 늘어났다. 통화정책 방향 문구도 “통화정책은 긴축 기조를 충분히 유지하는 가운데”에서 ‘충분히’라는 말이 빠졌다. 표면적으로는 10월 열릴 다음 금통위 회의에서 정책 전환이 있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 셈이다.
배경은 일단 ‘피벗(Pivotㆍ통화 정책 전환)’의 밑그림이 그려져서다. 최근 내수는 힘이 빠졌고, 물가 상승 압력은 약해지면서 금리 인하를 위한 전제 조건이 맞춰졌다.
한은은 이날 경제 성장률·소비자물가 상승률의 수정 전망치를 발표했다. 올해 성장률은 2.4%로 지난 5월 전망보다 0.1%포인트 낮췄다. 이번 한은의 전망치는 정부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전망치(2.6%)는 물론, 한국개발연구원(KDI)과 국제통화기금(IMF) 전망치(2.5%)보다 낮다. 수출 증가세에도 성장 전망치를 내린 건 내수 경기가 더 위축되고 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2분기 민간 소비 성장기여도는 -0.1%포인트로, 성장을 끌어내렸다.
‘불안한 물가’는 안정에 근접했다. 한은은 물가 상승률을 기존 2.6%에서 2.5%로 0.1%포인트 하향 조정했다. 최근 농산물 가격 상승세가 둔화하고, 국제 유가도 안정세를 보이자 전망치를 수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총재는 “물가상승률이 목표 수준(2%)에 수렴할 것이라는 확신이 커졌다”며 “물가 수준만 봤을 땐 기준금리 인하 여건이 조성됐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기준금리 인하의 발목을 잡은 건 불안한 집값이다. 이 총재는 “한은이 유동성을 과잉 공급함으로써 부동산 가격 상승 심리를 자극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며 “내수는 시간을 갖고 금리 인하 폭 등으로 대응할 수 있지만, 부동산 가격과 그에 따른 가계부채 증가 등 금융 불안은 지금 막지 않으면 더 위험하기 때문에 동결을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민간소비·투자 등 내수 부진은 금리 인하 시점이 좀 더 늦춰지더라도 이후 어느 정도 해결할 자신이 있지만, 최근 뛰는 집값과 가계대출은 당장 막아야 할 시급한 과제인 만큼 금리를 묶고 통화 긴축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섣부른 인하 시그널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집값 상승세를 자극할 우려도 크다.
여러 지표가 이 총재의 우려를 뒷받침한다. 앞서 한은이 20일 발표한 가계신용 통계에 따르면 주택담보대출 수요가 늘어 2분기 가계부채가 1896조원을 기록해 사상 최대치를 갈아치웠다. 8월 주택가격전망지수는 118로 전달보다 더 올라섰다. 정부의 8·8 부동산 공급 대책 발표 이후 서울 아파트 값은 전주보다 0.32% 오르며 약 6년 만에 가장 높은 주간 상승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총재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작심한 듯 부동산과 가계부채 현황을 우려하고 위험을 경고하는 메시지를 쏟아냈다. 부동산이라는 단어만 40번 넘게 썼다. 그는 “서울 등 특정 지역 부동산 가격이 통화정책의 수량적 목표가 될 수 없다”면서도 “한국경제 전체로 볼 때 부동산 가격이 소득과 비교해 너무 오르면 버블(거품)이 꺼지는 걱정뿐 아니라 자원배분 측면에서도 부동산에 대출 등으로 돈이 몰렸다가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 부동산 경기를 살려야 하는 이런 고리를 끊어줄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시장에서는 부동산 시장 상황에 따라 한은의 금리 인하 시점이 결정될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앞으로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 시기나 폭은 전적으로 부동산·금융 시장이 얼마나 빨리 안정되느냐에 달린 것이다. 현재 10월 인하설이 유력하지만, 두 달 안에 집값·가계대출 급등세가 뚜렷하게 잡히지 않으면 피벗은 11월 이후로 미뤄질 것이란 예상이 많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금리 인하가 성공하려면 부동산 쪽으로 가는 돈을 최대한 줄여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메커니즘이 없어 금리를 내릴 경우 유동성 상당 부분이 가계부채와 집값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양 교수는 "한은이 기준금리를 내리기 위한 마지막 퍼즐 조각이 집값 안정"이라며 "한은의 쓸 수 있는 수단은 금리라 한계가 있다. 정부가 정책과 규제를 활용해 집값을 안정시켜 달라고 정부에 요청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대통령실은 이날 기준금리 동결 결정에 대해 아쉽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금리 결정은 금통위의 고유 권한이지만 내수 진작 측면에서 보면 아쉬움이 있다”며 “다음 주 중으로 추석 명절 성수품 공급 등 민생 안정 대책과 함께 소비 진작 대책을 마련해 발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금통위 결정에 의견을 밝힌 건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대통령실 내부에서 금리 인하의 필요성을 높게 봤다는 해석이 나온다.
최근 정부는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스트레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강화 방침을 내놓으면서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한 만큼 불과 두 달 뒤인 10월에 한은이 기준금리를 낮출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9월 금리 인하 결정도 중요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시장은 21일 공개된 7월 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록을 토대로 9월 금리 인하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관심은 ‘얼마나 내릴 것인가’로 옮겨갔다. 9월 FOMC에서 0.25%포인트 인하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지만, 연내 1회 이상의 ‘빅컷(기준금리 0.5%포인트 인하)’ 가능성도 나온다.
조영무 LG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10월에도 가계부채ㆍ부동산ㆍ환율 여건이 좋지 않을 경우, 한은은 11월 이후로 인하 시점을 미룰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아직 한은의 경기에 대한 인식이 나쁘지 않은 점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임재균 KB증권 연구위원도 보고서를 통해 “10월 금통위까지 1~2달 둔화하는 부동산 가격 데이터를 갖고 인하를 단행하기엔 한은의 부동산에 대한 경계심이 강하다”며 “11월 인하, 또는 더 늦어질 가능성도 열어놔야 한다”고 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실장은 "시장에선 미국이 올해 0.75~1%포인트가량 금리를 내릴 수 있다고 보고 있는데, 기준금리 인상 폭이 미국보다는 작았던 한은 입장에서는 이런 인하 폭과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향후 인하 폭을 결정할 때 고민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한편 이날 서울 채권시장에서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전 거래일보다 0.033%포인트 내린(채권값 상승) 연 2.907%에 장을 마쳤다.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가 가까워졌다는 신호에 국고채 채권 가격이 강세를 보인 것이다. 하지만 장중 이창용 한은 총재의 가계부채 경고 발언 등 영향으로 채권 강세가 일부 되돌려지기도 했다.
곽재민ㆍ오효정 기자 jmkwa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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