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퇴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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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갑 기자]
지인들을 만나면 '퇴임하니 어떻냐?'라는 질문을 곧잘 받는다. 나는 퇴임한 것이 그렇게 실감 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퇴임 전의 나의 생활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지난날의 직업을 완전히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지인들은 '다른 사람들은 퇴임하니 너무 좋다고 하던데' 하며 나의 말에 의아해한다. 나도 말하고 보니 이상하다. 분명 퇴임 후 생활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무엇보다 퇴임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순간순간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데 왜 그렇게 대답하였지.
시골살이하면서 퇴임 전과 달라진 모습을 생각해 본다. 퇴임 후 시골살이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어떠하였을까? 아침 일찍 일어나 냉온욕 하러 목욕탕에 가고, 적당한 시간에 집 뒤에 있는 산에 오르고, 책도 좀 읽고, 뉴스를 시청하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
이런 삶이 되풀이되다 보면, 오늘은 또 어떻게 보내지 하며 이런저런 생각도 할 것이다. 그럴 때 낯선 곳을 여행하며 다른 문화와 경치 그리고 그들의 삶을 보면서 퇴임 후의 기쁨도 맛볼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그리 오래 가지 않을 듯하다. 여행도 이삼 년 하다 보면 이제 굳이 하는 생각도 들 것 같다.
또한 지인들과 연락이 닿으면 모처럼 술 한 잔 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즐거운 만남도 잠시 빈말에, 거듭되는 추억팔이에, 생각의 다름에, 돌아서는 길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이 한결같이 내 앞에 놓여 있다
나는 시골살이하면서 여유 속에 안락한 삶을 기대했다. 자연도 즐기고, 책도 보고, 음악도 듣고, 지인들도 만나고, 가끔 여행도 하고 등등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 아침 물안개 집 앞에 큰 계곡이 흘러가기에 아침이 되면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
ⓒ 정호갑 |
▲ 앞마당의 잡초 현무암 사이로 잡초들이 끊임 없이 올라오고 있다. |
ⓒ 정호갑 |
▲ 정원 잡초 잡초에 올해 심은 진달래와 달리아가 가려져 있다. |
ⓒ 정호갑 |
정원의 꽃과 나무들에 벌레가 보이면 친환경 살충제도 뿌리고, 잘 자랄 수 있도록 집에서 만든 커피 거름도 준다. 비가 예보되어 있는 날이면 배수로를 점검한다. 처마 밑도 살펴보아야 한다. 벌집들이 보인다.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모기살충제를 뿌리고 빗자루로 벌집을 떼어낸다.
낙엽이 지고 나면 여름내 마구잡이로 올라온 나뭇가지들도 잘라 준다. 겨울을 이겨날 수 있도록 낙엽으로 보온도 한다. 야외 수도도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도록 감싸 준다. 눈이 오면 마을 길의 눈도 치운다.
저기에 이 나무나 이런 꽃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땅을 파고 나무와 꽃들을 사와 심는다. 햇빛이 제대로 들지 않아 습해 나무와 꽃들이 자라지 않고 잡초만 무성한 곳이 있다. 이 부분은 잡초를 걷어내고 현무암과 파쇄석을 깔아 쾌적한 곳으로 만든다.
잔디마당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이쁘다. 이곳에 쉼터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잔디를 걷어내고 쉼터를 만든다. 정원을 가꾸다 보니 정원용품이 많이 생겼다. 둘 곳이 마땅찮다. 창고를 주문하여 조립한다.
▲ 저녁놀 하루의 힘듦을 보상해주는 저녁놀. |
ⓒ 정호갑 |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져 지난 날을 잊다
▲ 붓꽃과 청개구리 붓꽃에 살포시 앉은 청개구리. |
ⓒ 정호갑 |
그런데 지난해 가을, 분홍상사화 구근 30개를 집 둘레에 심었다. 6월까지 싹이 올라오고 잘 컸는데, 7월이 지나고 8월이 되어도 꽃대가 하나도 올라오지 않는다. 분홍상사화의 은은한 아름다움에 빠져 여기저기 있는 구근을 모아 한 곳으로 옮겨 심었는데 이럴 수가. 시골 정원에 너무 잘 어울려 기대했는데 아쉬움이 크다.
▲ 정원에 핀 국화 한 해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꽃, 국화. 오상고절이 그대로 와닿는다. |
ⓒ 정호갑 |
서리가 내리면 겨울이 머지 않았다는 알림이다. 다른 꽃들은 겨울의 추위를 피해 자취를 감추었을 때 국화만 홀로 피어난다. 그 삶을 따르고 싶지만, 그저 바라보며 부러워할 뿐이다. 그 향이나마 오래 간직하고 싶어 국화차를 만들며 가을을 보낸다.
꽃들은 저마다의 개성으로 피워낸다. 색과 향기, 모양, 크기, 시기를 모두 달리한다. 그런 꽃들을 보며 순수함을, 고결한 품격을, 소박함을, 화려함을, 열정을 읽으며, 그저 감탄하고 감탄한다.
▲ 마을 설경 뒷마당에서 바라본 마을 설경 |
ⓒ 정호갑 |
이렇게 시골살이하다 보면 송순의 <면앙정가> 한 구절이 저절로 떠오른다.
속세를 떠나와도 내 몸이 겨를 없다. 이것도 보려 하고 저것도 들으려 하고, 바람도 쐬려 하고 달도 맞이하려 하고, 밤은 언제 줍고 고기는 언제 낚고, 사립문은 누가 닫으며 진 꽃은 누가 쓸겠는가. 아침이 부족하니 저녁이라 싫겠는가. 오늘이 부족하니 내일이라 여유가 있겠는가. 이 산에 앉아 보고 저 산을 걸어 보니, 번거롭고 수고로운 마음이지만 버릴 것이 전혀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이, 퇴임 전이나 퇴임 후나 한결같이 앞에 놓여 있기에 그 일을 한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 번거롭고 수고로운 일이지만, 버리고 싶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하기에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온 감각으로 느끼며 맛보고, 자연의 섭리를 배우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아직 퇴임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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