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과 퇴계 두 거봉의 닮음과 다름

김삼웅 2024. 8. 22.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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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 16] 두 사람은 성리학을 공부했지만...

[김삼웅 기자]

▲ 퇴계 이황 퇴계 이황 1501 ~ 1570
ⓒ 김서연
16세기 조선사회는 걸출한 학자들이 많았다.

정암 조광조(1482~1514), 화담 서경덕(1489~1546), 보우(普雨, 1549~1565), 휴정(休靜, 1520~1604), 토정 이지함(李之函, 1527~1578), 퇴계 이황(1501~1570), 남명 조식, 율곡 이이(1536~1584) 등이다.

거듭된 사화와 당쟁으로 선비들이 제명에 살지 못하는 참극이 계속된 상황에서, 어느 시대에 못지 않는 인재들이 나온 것은 다소 역설적이었다. 그래서 16세기 조선은 정치의 폭정 속에서 학문(지성)의 서광이 비치는, '상처 입은 르네상스'였다고 하겠다.
 퇴계 이황이 손수 지었으며, 생전 머물며 학동들을 가르쳤다는 도산서당이다. 세로 현판과 이어 넓힌 처마가 독특하고 고유한 건축물이다.
ⓒ 김현자
퇴계와 남명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남명은 연산군 7년 1501년 6월(음)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서 태어나 선조 5년(1572) 음력 2월 산청군 시천면 사륜동에서 돌아가셨다. 퇴계는 같은 해 11월(음) 경상도 안현 온계리에서 태어나 1570년(선조 3) 음력 12월 18일 출생지에서 돌아가셨다. 남명이 퇴계보다 5개월 일찍 태어나 2년 2개월 늦게 돌아가셨다.

이들보다 2세기 늦게 출생한 성호 이익은 두 사람이 차지하던 위생에 대해 언급했다.

단군시대는 원시적이어서 문화가 개척되지 못했고, 천여 년을 지나 기자가 동쪽 지방에 봉합을 받게 되면서 암흑이 걷혀졌으나, 그것도 한강 이남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9백여 년을 지나 삼한시대에 이르러 이 지역의 경계선이 모두 정해져 삼국의 영토가 정해졌고, 또 천년을 지나 우리 왕조가 창건되면서 문화가 바로 열렸다.

중세 이후에는 퇴계가 소백산 밑에서 태어났고, 남명이 두륜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모두 경상도의 땅인데, 북도에서는 인(仁)을 숭상하였고, 남도에서는 의(義)를 앞세워 유교의 감화와 기개를 숭상한 것이 넓은 바다와 높은 산과 같게 되었다. 우리의 문화는 여기에서 절정에 달하였다.(이익, <성호사설>)
 남명 조식 선생 영정
ⓒ 김종신
두 사람이 유교적 도덕정치의 일현을 이상으로 여기는 유학자 곧 성리학자였다. 성리학(性理學)은 송학·명학·주자학·육왕학·이학·도학·심학 등 다양하게 불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조 이래 성리학이라 호칭되었다.

성리학이란 용어는 원래 '성명(性命)·의리지학의 준말'이다. 이 용어의 의미로 짐작할 수 있듯이, 성리학은 심성의 수양을 과거 어느 유학보다도 철저히 하면서, 동시에 규범 법칙 및 자연법칙으로서의 이(理)〈또는 성(性)〉을 깊이 연구하여 그 이의 의미를 완전히 실현하려는 유학중의 하나이다.

한마디로 하여 존심양성(存心養性)과 궁리(窮理)를 지극히 중요시함으로써, 종래의 유학 〈주체 객관 양면을 망라〉을 형이상학적으로 재구성·발전시킨 것이다. (주석 1)

두 사람은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당시에는 이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배웠고, 성리학은 조선사회의 정학(正學)의 자리에 위치하였다. 퇴계와 남명은 같은 시대의 대표적 성리학자로서 공통점도 많았지만 처세관과 현실인식에서 그리고 학문관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점이 있었다. 퇴계는 출사하여 대사성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남명은 시종 초야에서 처사의 길을 걸었다.

두 사람은 동년생, 같은 영남출신의 동학(同學)이면서 평생 한 번도 상면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신을 두 차례(혹은 3회) 주고 받았다. 그렇다고 비방하거나 시샘하는 등 세속적 행위는 일체 하지 않았다. 남명이 64살이던 해 퇴계에게 서한을 보내었다.
 남명 조식 선생이 태어난 생가(합천군 삼가면 외토리(外吐里)
ⓒ 김종신
평생 마음으로만 사귀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이 세상에 머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결국 정신적 사귐으로 끝나고 마는 것인지요? 인간의 세상사에 좋지 않은 일이 많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에 걸릴 것이 없음인데, 유독 이 점이 제일 한스러운 일입니다. 선생께서 한 번 의춘(의령)으로 오시면 쌓인 회포를 풀 날을 매번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까지 오신다는 소식이 없으니, 이 또한 하늘의 처분에 모두 맡겨야 하겠습니다. (주석 2)

출사와 시국관에서 차이가 있었다고 했거니와, 남명이 1564년 퇴계에게 다소 비판적인 편지를 띄웠다. 유생들의 부패타락상에 퇴계의 침묵에 대한 항의였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늘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정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진리를 담론하여 이름을 훔치고 세상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남에게 상처를 입게 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아마도 선생 같은 장로(長老)께서 꾸짖어 그만 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석 3)

이에 대한 퇴계의 답신이다.

보내주신 글월에 "이름을 훔치고 세상을 속인다"는 말씀은 유독 그대만이 걱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도 역시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꾸짖고 억제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째서 그렇겠습니까? 마음 가짐이 본래부터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훔치려고 하는 자는 말할 것도 못 됩니다. 홀로 생각건대, 하늘이 본성을 내려주어 사람들은 모두 선을 좋아합니다. 사람의 영재 가운데서 성심으로 학문을 원하는 사람이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내가 하늘과 성인의 문정(門庭)에서 죄를 얻는 것이 이미 심하거늘, 어느 겨를에 다른 사람이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훔치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주석 4)
남명은 이에 대해 회신을 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식으로,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 시속이 숭상하는 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나귀 가죽에 기린의 모형을 뒤집어씌운 것 같은 고질이 있습니다. 온 세상이 모두 그러해 혹세는 면하는데 급급하고 있으니, 크게 어진 이가 있더라도 구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실로 사문의 종장인 사람이 오로지 상달만 주로하고, 하달을 궁구하지 않아 구제하기 어려운 습속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그와 더불어 처신을 왕복하여 논란을 했지만, 돌아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공은 지금 폐단을 구제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석 5)

주석
1> 윤사순, <한국성리학의 전개와 특징>, <한국사상의 심층연구>, 189쪽, 우석, 1982.
2> 강정화, 앞의 책, 125~126쪽.
3> <퇴계에게 드림>, <교감국역 남명집>
4> <퇴계전서>, 권 10, <답조전중(答曺傳仲)>.
5> <교감국역 남명집>, <오자강에게 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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