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의 놀라운 얼굴, 그게 감독의 돌파구였다

고광일 2024. 8. 2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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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리볼버>

[고광일 기자]

 영화 <리볼버> 스틸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승욱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영화 <리볼버>의 기획 의도를 밝혔다. 바로 배우 전도연의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도연이 맡은 <리볼버>의 주인공 하수영은 모든 것을 뺏긴 기구한 여자다. 그러나 그것이 전도연에게 새로운 얼굴은 아니다. 빼앗긴 것으로만 따지자면 <밀양>의 신애가 압도적이다.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이사한 신애의 하나뿐인 아이가 유괴, 살해된다. 신애는 신앙의 힘으로 유괴범을 용서하겠다 결심하지만, 유괴범은 이미 신에게 용서받았다고 고백한다. 용서할 기회까지 뺏긴 신애에게 남은 건 분노뿐이다.

<리볼버>에서 경찰인 수영은 비리에 연루된다. 경찰 윗선과 재벌이 엮인 마약 사건에서 모든 죄를 뒤집어쓰는 대신 받기로 한 건 남향이라 햇빛이 잘 드는 서울의 신축 아파트 한 채. 그리고 출소 후 경비실장이라는 일자리다. 2년의 세월이 흐르고 출소한 그녀를 찾아온 건 생전 처음 보는 술집 마담 정윤선(임지연)뿐. 이제야 배신당했음을 깨달은 수영은 대가를 약속했던 재벌가의 망나니 앤디(지창욱)를 찾아 나선다.

수영은 칼부림 난동을 겪은 후 일선에서 물러나 타고난 미모와 능력을 활용해 경찰 아나운서로 승승장구 중이었다. 동시에 선배인 임석용(이정재)와 불륜을 저지르며 동료를 배신하고 돈과 권력을 취했다. 영화는 비리 경찰, 불륜녀, 배신자 속성을 두루 갖춘 비호감의 극치 하수영의 모든 면을 좋아할 수 있도록 관객을 설득하려는 야심으로 출발한다. 감독이 선택한 돌파구는 뜻밖에도 전도연의 피로한 얼굴이다.

리볼버의 과녁을 찾아서

수영은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석용에 대한 마음은 이미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여기서 나가면 모든 것을 잊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감정 섞인 원한이 있는 건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동호(김준환)이나 배신당한 기현(정재영) 정도일까. 금전 관계가 얽힌 이들은 오히려 깔끔하다. 수영에게 주기로 한 돈을 앤디가 카지노에서 돈을 날렸을 뿐. 배신을 당해야만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나 거대한 음모는 없다. 앤디를 만나서도 책임을 지고 약속을 지키라 소리치는 그녀에게 중요한 건 아파트를 받는 것뿐이다.

하지만 출소한 수영의 존재 자체가 치워 버리고 싶은 피곤한 짐덩이다. 수영이 받기로 한 신축 아파트의 분양가는 7억 원. 수십, 수백억의 판돈이 우습게 깔리는 영화판 설정에서 교도소에 있는 동안 올라서 15억 원이 된 아파트가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의 운명을 극적으로 바꿀 만한 큰돈은 아니다. 그런 애매한 돈에서 어떻게든 콩고물이나 주워 먹으려 귀찮은 일을 토스하는 시시한 캐릭터들 사이에서 짐덩이가 된 수영의 존재감과 스스로 느끼는 피로감은 커진다.

이렇게 영화적이지 않은 돈이고, 보잘것없는 마음들이라 오히려 생기는 몰입감이 있다. 오승욱 감독의 전작 <무뢰한>도 그랬다. 변변한 가구 하나 없이 홑이불 깔린 단칸방에서도 개다리소반에 김치 한 종지, 잡채 한 그릇, 소주 한 병을 두고도 진심을 담은 사랑을 저울질하던 명장면처럼 거창한 대의명분이 아닌 유치한 자존심, 명예나 양심을 내다 팔기에 너무 보잘것없는 푼돈의 유혹에 휘둘리는 <리볼버>의 평범한 주인공들이 언제든 우리가 될 수 있는 까닭이다.
 영화 <리볼버> 스틸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신축 아파트의 하자를 점검하러 갈 때도 하이힐에 착 달라붙는 스커트를 입고, 수사를 받을 때도 고급스러운 실크 블라우스에 굵은 웨이브를 한껏 넣어 품위를 유지하던 수영. 체온에 맞는 온수를 준비해 위스키에 떨어뜨린 후 폭발하는 위스키의 향을 즐기던 그녀는 출소 후에는 전투복이라도 되는 양 허름한 로드샵에 걸쳐있던 스카잔을 걸치고 드라이기 하나 없는 생머리를 대충 풀어헤치고 다닌다. 마시면 돈을 돌려준다는 말에 피가 섞인 위스키를 원샷하는 수영이 노리는 과녁은 배신한 일당의 심장이 아니라 오직 아파트 등기부등본과 명의자의 인감이다.

따라서 수영이 품고 다니는 리볼버의 과녁도 다르다. 영화에서 <존 윅> 시리즈나 <아저씨> 같은 총이 불을 뿜는 통쾌한 복수를 기대했다면 잠시 실망할 수는 있다. 기현에게 건네받는 리볼버는 격발하기보다 총알을 품고 있을 때의 존재감이 크다. 건네받는 수영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이는 기현은 수영을 돕는 것 같지만, 자신을 배신한 수영과 이미 숨진 석용이 파멸하길 바란다. 단 한 발이면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바닥까지 추락하는 하이패스를 건넨 것이다.

전도연의 어디가 그렇게 좋냐

수영의 리볼버는 조사장(정만식)의 손가락을 날리고 자신에게 총구를 겨눴던 동호를 향해 딱 한 번 불을 뿜는다. 그마저도 옛정을 담은 총알은 그의 심장을 관통하는 대신 귓전을 찢고 지나간다.

한바탕 소동이 지난 뒤 밤을 꼴딱 새우고 앤디를 인질로 삼은 수영은 그레이스의 비밀을 알게 되지만 '불행을 떠들지도, 이용하지도 않고 사라지겠다'고 말한다. 비리 경찰로 전락했지만 책임을 지고 약속을 지키는 수영은 받은 만큼만 받고 돌려줄 만큼만 돌려준다.

결국 약속한 돈을 받아낸 수영은 뚝방에 좌판에서 꽁치구이를 시키고 돈다발을 내민다. 아주머니는 수영을 한번 물끄러미 바라본 뒤 돈다발에서 5만 원 권을 한 장만 빼가고 석쇠에서 잘 익힌 꽁치 두 마리와 소주를 한 병 내어준다. 서울 중심가 호텔 방을 잡고 창밖을 보며 위스키 한잔하겠다는 위시리스트에 없던 초라한 한 상. 복잡한 풍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희석식 알코올은 수영에게 투명하고 피로한 취기만을 선사할 것이다.

21회 부천국제환타스틱영화제 특별전 책자 <전도연에 접속하다>에서 한 평론가는 '기구한 여인이란 소재는 오래된 상투지만 전도연은 기구한 삶을 설득적으로 이행하며 삶의 경련을 창의적으로 연기해냈다'는 평을 남겼다. 목표를 달성했지만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하수영, 아니 삶의 경련으로 피로함을 연기하며 또 한 번 새로운 얼굴을 보인 전도연을 클로즈업한 채 영화의 막이 오르면 '전도연의 어디가 그렇게 좋냐'는 질문에는 결국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에브리띵.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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