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의 비극, 잘못된 신념은 어떻게 국가를 망치는가
[이준목 기자]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1637년 만주족의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판도를 크게 뒤바꾼 사건이었다. 청은 병자호란을 통해 조선을 완전히 굴복시켰고 국왕 인조가 청 태종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조선 역사상 최악의 비극인 '삼전도의 굴욕'까지 벌어지게 된다.
삼전도의 굴욕은 조선에 있어서는 단순히 한 전쟁에서의 패전을 넘어서 후대까지 사회 전반에 심각한 '이념적 공황'을 불러온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왜 떠오르는 강대국인 청나라와 애초에 승산도 없는 전쟁을 벌였고,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오늘날의 대중적인 인식처럼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이 그저 무능하고 국제정세에 어두운 우물안 개구리였기 때문이라는 평가는 과연 얼마나 진실일까.
8월 21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은 '조선은 왜 청나라와 전면전을 불사했나'편을 통하여 병자호란의 이면에 숨겨진 당시 조선의 속사정과 역사의 진실을 조명했다.
1623년 3월 12일,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15대 국왕 광해군이 폐위되고, 조카인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16대 국왕 인조다. 인조를 옹립한 서인 반정세력은 광해군을 폐위시킨 주요한 정치적 명분중 하나로 배명(背明) 행위, 즉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것을 내세웠다.
화이관(華夷觀)은 한족이 이른 중화문명을 숭상하고, 그 이외의 민족이나 문명을 야만적인 오랑캐로 분류하는 주자학식(유교식) 문명론으로, 한마디로 극단적인 중화사상이었다. 조선 이전의 왕조인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거란(요), 여진(금), 몽골(원) 등을 겪으면서 당대의 패권국을 '황제국'으로 인정하는 유연하고 실리적인 사고를 보였던 것과 달리, 조선의 지배층은 유교적 사회 질서가 굳건해질수록 국익이나 현실과 무관하게 한족 왕조 중심의 화이관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조선은 본래 건국 초기까지만 해도 명나라에 대한 인식은 국익을 위하여 온건한 군신(君臣)관계 형식을 유지해온 우방국 정도였다. 하지만 16세기에서 들어서면서 조선 사회의 교조화, 임진왜란과 명나라의 지원 등으로 인하여, 부자(父子) 관계에 가까운 개념에 가깝게 명나라를 숭상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변질되기에 이른다.
유교적 세계관에서 '군신과 부자'의 차이는, 전자는 군주와 신하가 각자의 도리를 다한다는 전제하에 서로 충성과 의리를 지키는 관계라면, 후자는 혈연을 기반으로 출생에서 사후까지 영원히 불가변적 관계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 중기의 사대부들은 핏줄로 이어진 아버지와 아들처럼 명나라에 무조건 효를 다해야하는 부자관계에 가깝게 인식했고, 더 나아가 이를 '조선의 국가 정체성'으로까지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다보니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국제정세에 맞춘 융통성있는 외교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비극의 시작은 명나라가 16세기 들어 급격히 쇠퇴하며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것이다. 명나라와 후금의 전쟁이 벌어졌을 당시, 명나라는 조선에 임진왜란 당시 지원해준 은혜에 보답할 것을 요구한 반면 후금은 조선과 상관없는 전쟁이라며 명나라를 돕지 말라고 경고했다.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광해군은 흔히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쳤다는 인식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당시 조선의 속사정을 고려할 때 광해군 정권의 외교가 중립보다는 차라리 '이중외교'라는 표현에 더 가깝다는 평가도 나온다.
당시 국제정세를 감안하면 후금은 떠오르는 신흥강국, 명나라는 노쇠했어도 여전히 중원의 패권국으로 어느 쪽이 최후의 승자가 될지는 당시로서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어느 편도 들 수 없었던 조선으로서는 명나라와 사대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후금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했다. 이는 그 당시로서 특별히 전략적인 판단이었다기보다는, 생존을 위하여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알려진 것과는 달리, 광해군 정권의 이중외교가 끝까지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후기로 갈수록 광해군은 후금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명나라 황제의 징병 요구 칙서를 대놓고 거부하는가하면, 점차 친후금 노선으로 기울게 된다. 그리고 이는 광해군의 정적들과 친명파 위주의 사대부들에게는, 명을 배신한 광해군 정권에게는 '불의하다'는 정치적 프레임을 씌워 정권교체를 정당화하는 명분을 제공했다.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집권한 인조 정권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하여 표면적으로 다시 후금을 배척하는 친명배금(親明排金) 외교 노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후금은 1627년(인조 5년) 조선을 첫 번째로 침공하는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킨다.
그런데 오늘날 학계에서는 '인조 정권의 노골적인 친명 외교노선이 후금의 침공을 자초했다'는 인식과는 달리, 정묘호란은 후금의 정치적 목적으로 어차피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이었다는 해석이 늘어나고 있다. 양면전선을 우려하여 조선 침공에 소극적이었던 누르하치와 달리, 그 뒤를 이은 홍타이지(훗날의 청 태종)는 명나라와의 전쟁을 위해서는 조선을 먼저 제압해야 하며 후방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강경파였다.
후금은 침공을 해놓고도 오히려 조선에 먼저 화친을 요구했다. 이때만 해도 후금의 목적은 완전한 정복이 아니라 조선을 우호 세력으로 만드는 정도였다. 조선은 이러한 후금의 요구를 수용하여 화친을 맺으니 이를 정묘화약(丁卯約條) 혹은 정묘맹약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조 정권이 오랑캐라고 비난하던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전대미문의 사건은, 정치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자신들이 비난하며 끌어내린 광해군보다도 더한 패륜을 저지른 셈이 되어 정권의 정통성과 권위에 큰 흠집을 남긴 것이었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정묘맹약을 맺은 뒤 인조는"신은 광해군이 아직 죽기 전에 종사가 먼저 망해 천고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렵다"는 한 상소를 받았다고 한다. 폐위되어 유배를 떠난 광해군보다 나라가 먼저 망할까 걱정된다는 이야기는, 인조에게 있어서는 "당신이 광해군보다 나을게 뭐냐""이럴바에는 왕을 바꾼 것이 잘한 일일까"라는 공개적인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정묘호란을 전후하여 조선 조정은, 김상헌 등 항전을 요구하는 척화파(斥和派)와, 최명길처럼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主和派)로 더욱 극명하게 나뉘게 된다. 두편으로 갈렸다고는 해도, 당시 지배층인 사대부의 주류는 사실상 척화파가 압도적이었다. 반정으로 옹립된 인조로서는 사대부들의 여론을 함부로 거슬렀다가는, 자신도 광해군처럼 언제든 쫓겨날수도있다는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636년, 조선의 운명을 바꾸는 또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 벌어진다. 홍타이지가 국호를 후금에서 청나라로 바꾸고 황제국을 선포하면서 형제관계였던 조선에게 군신관계를 요구한 것이다. 그동안 명나라만을 유일무이한 '천자의 나라'로 인정하고 섬겨왔던 조선으로서는, 이제 명과 청 사이에서 한 나라만을 분명히 선택해야하는 기로에 놓이게 된 순간이었다.
조선은 청나라의 군신관계 요구를 거부했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인조는 설사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섬기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답했다. 이는 청나라에 대한 사실상의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과연 인조는 정말로 조선이 청나라를 상대로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당시 조선 내부에서는 청나라의 거듭된 압박에 분노하여 반청 여론이 절정에 달했고, 조정의 대부분이 척화파에 일방적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이들은 배신자나 매국노로 매도되는 분위기였다. 인조나 극소수였던 주화파로서는 다른 선택을 하고 싶어도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1636년 12월, 청나라는 병자호란을 일으켜 두 번째로 조선을 침공한다. 청나라는 방어선을 일일이 점령하지 않고 바로 수도로 진격하여 왕을 사로잡는 '직도(直擣)'전략을 채택했다.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인조는 남하한 청군에 길이 막히며 다급하게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홍타이지는 이례적으로 직접 조선 정벌을 위하여 직접 친정에 나섰다. 홍타이지는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에게 모욕적인 서신을 보내어 조롱하며 "지금이라도 성밖으로 나와 항복하면 왕 노릇은 계속하게 해주겠다."고 도발했다고 한다.
궁지에 몰린 인조는 주화파 신료들의 주도로 홍타이지에게 답서를 보냈다. 인조는 조선과 명나라와의 특수한 관계를 호소하며, 홍타이지에게 천자다운 아량을 보여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인조의 변명을 일축하며 "지금 네가 살고 싶다면 빨리 성에서 나와 귀순하고, 싸우고 싶다면 또한 속히 한번 겨뤄보자"고 협박에 가까운 최후통첩을 전한다. 실록에 따르면 인조는 "형세가 이미 막다른 길까지 왔으니 차라리 자결하고 싶다. 나 또한 어찌해야하리 모르겠다"며 막막한 심경을 드러냈다고 한다.
여기서 의구심을 자아내는 대목은, 이처럼 국왕이 사지에 고립되고 나라가 망국의 위기에 놓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조선의 지배층은 시종일관 비현실적인 척화를 주장하는 여론이 끝까지 주류였다는 사실이다. 과연 이들이 정말로 현실을 모르는 무능한 이상주의자이거나, 혹은 투철한 애국자였기 때문이었을까.
한편으로 오늘날 일부 학계에서는, 당시 척화론 자체가 애국심보다 사실상 양반 지배층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한 구호에 불과했다는 파격적인 해석도 나오고 있다.
고려시대의 여몽전쟁이나 한 세대 전의 임진왜란같은 국가적 위기를 겪으면서도 끝내 나라가 멸망하지는 않았던 전례가 있었다. 당시 조선의 지배층들 역시 설사 전쟁에 패배한다고 해도 왕실은 무너질지언정, '사대부 자신들의 권력은 계속 유지될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병자호란 이후에도 조선은 멸망하지 않았고 양반 사대부 계층에 의한 신분제와 지배구조도 변화가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결국 대세가 기운 것을 깨달은 인조는 홍타이지의 요구를 수용하여 성밖으로 나와 항복한다. 인조는 홍타이지 앞에서 항복 의식으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여 신하가 될 것을 서약했다. 조선 역사상 외국의 침입으로 왕이 직접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한 사례는 인조가 유일하다. 조선을 정벌한 청나라는 8년 뒤에는 멸망한 명나라를 이어 중국대륙의 새로운 패권국으로까지 올라서게 된다.
만일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버티고 항전했다면 혹시 병자호란의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까. 학계에서는 당시 청군이 조선에 항복을 재촉한 이유로 군영에 '천연두'가 퍼졌기 때문이라는 학설도 나온다. 하지만 조선으로서는 이런 청나라의 내부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실제로 청군은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자마자 곧바로 신속하게 조선에서 완전 철군한다.
인조는 비록 삼전도의 굴욕 이후에도 왕위를 지켰지만 이미 군주로서의 권위와 정통성은 땅바닥으로 떨어진 뒤였다.
후대의 대표적인 유학자 송시열도 <송자대전>에서 이를 언급하며 '삼전도의 굴욕이 합리화되는 순간, 조선의 수직적 통치질서가 붕괴될 것'이라고 우려했고 '그렇게 되면 우리 모두 금수의 무리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 지배계층 사이에서 삼전도의 굴욕이 얼마나 큰 충격을 준 사건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조선은 이후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 시대에 이르러 '북벌론'을 내세우며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고 멸망한 명나라의 복수를 표방한다. 하지만 북벌론은 당시 국제정세와 국력차이를 고려할 때 현실성없는 이야기였다. 효종은 청에 우호적인 형 소현세자가 귀국한 후 아버지 인조의 미움을 받다가 의문사한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조선은 여전히 보수적인 사대부들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효종이 어쩌면 본인도 믿지 않았을 북벌론을 국정 목표로 전면에 내세운 것은, 사대부들의 지지를 확보하여 추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국내 정치용 선전구호에 불과했다.
1652년(효종 3년) 조선은 이후 청나라와 연합하여 나선정벌(羅禪征伐)에 참여하여 러시아군과의 소규모 전투에서 작은 성과를 올린다. 하지만 결국 청나라를 향한 북벌은 끝내 효종이 승하할 때까지 단 한번도 실현되지 못했다. 그리고 후대인 손자 숙종 시대에 이르면, 나선정벌이 청나라를 대신하여 이루지 못한 북벌(북방 오랑캐=러시아)의 성공을 증명하는 일종의 대체 역사로까지 격상되면서 과거의 역사적 아픔을 미화하려는 '기억조작'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삼전도의 굴욕이 남긴 국가적 패닉의 후유증은,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도 끝내 청산하지 못한 아픈 트라우마로 남았다.
'우리에겐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동맹도 없다.'
19세기 영국의 총리였던 헨리 존 템플의 격언이다. 병자호란의 비극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남겼을까. 조선의 지배층들은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라는 고정관념에 갇혀 변화하는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오히려 더 큰 트라우마를 자초했다. 냉정한 국제관계에서는 선악이나 명분에 집착하기보다 국익에 따른 실리적인 선택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뼈아픈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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