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자고 작정한 시인의 시

안준철 2024. 8. 22.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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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류미야 시집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안준철 기자]

난데없는 돌멩이에 물낯이 깨졌으나/
이내 심연 속으로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오늘 그 강변으로 가 내 얼굴 씻고 왔다
- 시 <자존> 전문

류미야 시인을 초청한 자리에서다. 시인은 슬픔에 대해 이야기했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고. 슬픔의 반댓말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에 대한 무심함이라고. 슬픔을 아는 것에서 시나 예술은 시작된다고. 슬픔을 통해 배려와 공감을 확대해갈 수 있다고.

시인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대인관계에서 자주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그때 느낀 슬픔을 성격상 잘 해소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후에 반전이 일어난다. "난데없는 돌멩이에 물낯이 깨졌으나//이내 심연 속으로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 강변으로 가 내 얼굴 씻고" 오는 그런 숭고한 일이.

슬픔의 승화라고나 할까. 나도 슬픔의 힘을 믿는다. 하지만 슬픔의 미학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태도를 갖곤 했었다. 슬픈 시는 아름답지만 그 슬픔이 허구가 아닌 시인이 경험한 슬픔이라는 점에서 그 슬픔의 심화나 지속을 반길 수만은 없었던 것. 하지만 슬프자고 작정한 사람을 어찌 말릴 것인가.
▲ 시집 표지 류미야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서울셀렉션 시인선, 2021년)
ⓒ 안준철
나는 눈물이 싫어 물고기가 되었네/폐부를 찌른들 범람할 수 없으니/슬픔의 거친 풍랑도 날 삼키지 못하리//달빛이/은화처럼 잘랑대는 가을밤/몸에 별이 돋아 날아오르는 물고기/거꾸로 박힌 비늘도 노櫓 되어 젓는//숨이 되는 물방울....../숨어 울기 좋은 방....../물고기는 눈멀어 물을 본 적이 없네/그래야 흐를 수 있지/그렇게 날 수 있지//생은 고해苦海라든가 마음이 쉬 밀물지는 내가 물고기였던 증거는 넘치지만, 슬픔에 익사하지 않으려면 자주 울어야 했네 - <물고기자리> 전문

시집 해설을 쓴 서윤후 시인은 "이 시는 슬픔이라는 거대한 물속에서 익사하지 않으려고 적응한 자신을 물고기로 승화시킨다"라고 평한다. "시인이 슬픔을 어떻게 응대해왔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시인이 슬픔 말고도 많은 색깔의 감정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을 했을 때 나는 그 말이 너무 반가워 찔끔 눈물이 날뻔했다. "슬픔에 익사하지 않기 위해 자주 울어야 했던" 시인이 아닌가. 시 한 편을 더 읽어보자.
어느 밤
동굴처럼 캄캄해져
울고 있는데

터진 눈 반짝이며
그들이 내게 말했다

여기 봐, 날 좀 보라고, 별거 아냐 부서지는 거.
- <별> 전문

가난한 시인에게 좋은 시를 읽는 것만큼 더 좋은 일이 있을까. 더 좋은 배움이 있을까. 시 한 편이 내게 와서 나는 부서지면서 재건된다. 조금은 다른 존재가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은 시가 이해되어야 한다. 아무리 읽어도 무슨 뜻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시는 나를 부서지게도 재건하지도 못한다.

"별거 아냐 부서지는 거."

류미야 시의 미덕은 쉽게 이해가 되면서도 숨을 멎게 하는 시적 긴장을 제공해주는 데 있다. 저 대목에서 어떻게 숨이 멎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느 날 시인은 머리를 감는다. "풀고 또 풀어도 엉켜드는 낮꿈의/가닥을 잡아보는/시린 새벽의 의식儀式"을 행한다. 시는 이렇게 끝이 난다.

너에게
세례를 주노니
잘 더럽히는
나여
- 시 <머리를 감으며> 부분

시 전반부와는 달리 이텔릭체로 표기한 것은 자기와의 대화, 즉 독백이기 때문인듯하다. "잘 더럽히는/나여"에서 잠깐 숨이 멎었다. "잘 더럽히는 나"는 바로 '내'가 아닌가. 말하자면 공감의 전율이랄까. 읽다가 숨이 멎었던 몇 곳을 더 적어본다.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혹은 한 자리에 있기나 하는지요
날리는 저 꽃잎들 다 겨울의 유서인데요
- <그래서 늦은 것들> 부분

달빛에/기대는 건/슬픔 몸을 구부려/
어머니 옛 궁宮으로/잠시 숨어드는 일
- <달에 울다> 부분

그를 저가/봅니다//저를 그가/봅니다/
그리운 족속들/이 별에도/삽니다/
가슴속/내려앉지 못합니다/보내주어야 합니다
- <강과 새> 전문

문태준 시인은 추천사(표4)에서 "류미야 시인의 시는 삶의 적막과 공허를 두 손으로 가만하게 감싸는 사랑의 언어이다. 사랑의 간구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에 간절하겠는가."라고 말한다. 시인에게 사랑과 슬픔은 동의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이렇게 적어볼 수도 있겠다. 슬픔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에 간절하겠는가.

류미야 시인은 2015년 <유심>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첫 시집 <눈먼 말의 해변>을 낸 뒤 3년 만이다. 서윤후 시인은 해설에서 "첫 시집을 통해 자기 자신을 더욱 애틋하고 고통스럽게 빚어내며 슬픔을 출발시켰다고 한다면, 3년여 만에 출간한 이번 시집에서는 그 슬픔이 어디에 도착하여 어떻게 서식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라고 평하고 있다.

시인의 초청 강연이 있던 날 나는 시인이 사인한 시집을 상으로 받았다. 질문을 많이 한 모범 학생(?)에게 주는 상이었다. 나는 시를 배우는 것이 즐겁다. 류 시인보다 더 많은 시집을 냈지만 아직은 시가 많이 고프다. 나에겐 무엇이 부족한 걸까? 어렴풋이나마 그 답을 알게 해준 시다.

세상 가장 앞뒤 없이 아름다운 말이 있다면
눈앞 캄캄해지는 바로 이 말 아닐까
해와 달 눈부심 앞에 그만 눈이 멀 듯이

큰 기쁨 깊은 사랑 크나큰 마음으로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눈멀어, 아주 한 마디로 끝내주는 이 말
- 시 <맹목> 전문

맹목은 앞뒤 없는 "큰 기쁨 깊은 사랑 크나큰 마음"의 다른 말이리라. "슬픔은 기쁨의 반댓말이 아니라 슬픔에 대한 무심함"이라는 시인의 말로 다시 돌아온다. 슬픔에 대한 무심함은 세상에 대한 무심함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사랑은 '자존'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차마 눈 뜨고는/볼 수 없는 세상의//오욕을 씻어내느라/지하로/흘러들"다가 "수포水泡로 돌아간대도/비루할 순 없는 일(시 <비누, 파르티잔>)"이다.

류미야 시인은 2018년 공간시낭독문학상, 2019년 올해의 시조집상, 2020년 중앙시조신인상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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