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금융사]대중심리 포착한 케인스, 세계 경제정책을 바꾸다

2024. 8. 22.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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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자율에만 기대면 불황
정부가 개입해 일자리 창출"
대공황의 교훈 적극적 설파
초국가적 통화기관 꿈꾸며
IMF 토대 만들어 초대부총재
세계화폐 도입 시도 美에 막혀
백영란 역사저널 대표

전 세계가 대공황으로 고통받고 있던 시대에,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가 홀연히 세계무대에 등장했다. 영국 재무부의 공식 대표인 케인스는 1919년 1월부터 6월까지 이어진 파리 외곽 베르사유 궁전의 평화 회의에 참석했다. 이 뛰어난 35세 경제학자는 이전에도 인도 통화에 대한 업적과 전쟁 중 영국 재정을 관리한 공로로 찬사를 받았다.

파리에서 그는 경제 위원회에 참가해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에게 조언했지만 중요한 평화 결정은 그의 손을 떠났다. 윌슨 대통령, 로이드 조지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가 실제 의사 결정자였다. 이미 항복을 선언한 독일은 연합국과 조약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고, 공식적으로 전쟁이 끝났다. 1918년 가을에 이르러 독일 지도자들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았다. 4년간의 끔찍한 소모전 끝에 독일은 더 연합군에 저항할 병력이나 자원이 없었다.

연합군은 미국의 인력과 물자 등 엄청난 지원을 받았다. 독일 정부는 연합군의 독일 침공을 막기 위해 미국에 휴전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해 초 윌슨은 독일과 적들 사이에 ‘공정하고 안정적인 평화’를 위한 조건을 제시한 ‘14개 조항’을 선포했다. 독일은 이러한 조건에 따라 휴전을 성립시킬 것을 요청했고 연합군도 독일에 공정하고 이타적인 최종 평화 조약을 보장했다.

1918년 11월 11일에 휴전이 체결돼 발효되었고, 드디어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전투는 끝났다. 베르사유 회의에서 케인스는 그의 저서인 ‘평화의 경제적 결과’를 발표했다. 케인스는 이미 제1차 베르사유 조약이 나치 국가를 탄생시킬 것을 예측했다. 독일을 향한 징벌적 협정을 가장 노골적으로 비판한 사람 중의 한 명이 바로 케인스였다.

그는 항의의 표시로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5개월 후에 그의 저서 ‘평화의 경제적 결과’라는 책을 출판했다. 케인스는 조약에 의해 독일에 부과된 지나친 전쟁 배상금과 그 밖의 가혹한 조건이 국가의 재정적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 주장했다. 이는 차례로 유럽과 세계에 심각한 경제적, 정치적 여파를 미칠 것이라고 예측했다. 케인스는 어떻게 든 전쟁을 막고 싶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진심으로 책을 집필하는 것이었다. 경제 논문 같은 그의 책은 이례적으로 널리 읽혔다.

이 책에서 케인스는 다음 세대 유럽인들에게 특히 관련성이 있을 암울한 예언을 했다. “만약 우리가 중부 유럽의 빈곤화를 목표로 한다면, 반동 세력과 혁명의 절망적인 사태를 맞이할 것”이라며 “그런 상황을 맞이한다면, 누가 승자가 되든 우리 세대의 문명과 진보를 파괴할 것이다”고 말했다. 독일이 보복을 위해 전쟁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고 합리적으로 추측했다.

암울한 시대를 경험한 케인스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이 스스로 균형을 이루게 된다는 애덤 스미스의 주장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욕망을 바닥까지 경험한 케인스는 더 사람을, 시장을 믿을 수가 없었다. 케인스는 오히려 시장은 본래 불안정하다고 주장했다. 생산, 가격, 고용 등은 실제 끊임없이 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경제 자체는 늘 변화하는 불안정한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경제란 본래 호황과 불황, 성장과 후퇴를 넘나들며 그 역시 변화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케인스는 대공황은 우연히 찾아온 사건이 아니라고 했다. 만일 경제를 시장의 자율적인 조정 능력에만 기대면 언젠가는 또다시 참담한 불황 국면을 맞게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곧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시장에 대해서는 정부가 개입하여 일자리와 소득을 창출할 필요성이 있다고 했다. 그것이 대공항의 교훈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향후 세계 경제체제에 관한 미국과 영국사이에 암투가 있었다. 1931년 영국이 금본위체제를 포기하자, 경제학자 케인스는 금융제국 영국을 다시 꿈꾸었다. 곧 세계적인 규모의 슈퍼뱅크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케인스의 구상은 ‘국제결제은행’으로 태어났다. 국제결제은행은 유럽과 미국 등 각국 중앙은행의 정책담당자들이 모여 정책을 조정하는 기구였다. 당시 국제결제은행은 주로 국제적인 편제와 배상을 결제하는 어음교환소의 기능을 담당했다. 영국은 이를 주도하려고 했다. 계획대로 성공한다면 세계의 모든 통상과 자산 및 신용은 정부로부터 독립돼 비밀리에 움직이는 소수의 권력이 지배할 수 있었다.

실제로 케인스의 절친인 영국은행장 노먼이 1930년 설립한 국제결제은행은 독립적이면서도 사적인 조직이었다. 정부에 대해서도 의무와 책임이 없었다. 그 뒤에 경제학자 케인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제결제은행 제도상의 결정은 모두 케인스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국제결제은행의 탄생을 앞두고 ‘초국가적인 통화기관’의 토대를 만들고자 했다. 케인스가 말한 초국가적인 기관이 바로 IMF이다. IMF는 본래 세계은행의 업무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었다. 세계은행과 IMF의 창설은 1944년 미국이 주도하는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결정했다. 세계은행 초대 부총재로 취임한 케인스가 그 회의를 이끌었다.

케인스는 2차대전 후에는 브레튼우즈 회담에 영국대표로 참석하여 세계화폐를 도입할 것을 주장했지만 패권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달러를 기축통화로 정했다. 케인스는 경제학은 내면의 성찰과 가치를 취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경제학이란 동기와 기대, 심리적인 불확실함을 다루는 것이라 말한다. 실제로도 케인스 경제학의 대부분은 대중심리에 관한 것이다. 실제로 그의 경제이론 배후에는 그 자신의 욕망이 있다.

백영란 역사저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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