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과로사 기사에 달린 충격 댓글... 김남주 처방 절실
김남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딱 30년이 되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고 노래한 시인의 바람대로,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걸어온 것일까.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김남주 정신이 필요하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지금 여기에서 김남주가 다시 살아 서 있는 모습을 그려본다. 24인의 문학인들과 활동가들이 2024년의 한국 사회를 짚어보며,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김태선 기자]
▲ 김남주 |
ⓒ 김남주기념사업회 |
최근 포스트휴먼이니 객체지향존재론 같은 것들이 인문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된 까닭 역시 인간이 이 지구에 저질러놓은 잘못을 이제 피부로 체감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때문에 오늘날 김남주의 문학을 다시 생각하는 일에 관한 글쓰기의 주제로 이참에 그와 같은 담론과 엮어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차에, 인터넷에서 열대야 등의 키워드를 검색했기 때문인지, 유튜브를 보던 중 한 편의점에 이온 음료를 사러 들어온 남성이 쓰러진 일에 대한 뉴스 보도를 만나게 되었다.
해당 뉴스는 8월 9일 업로드 된 유튜브 JTBC 뉴스 채널의 "[자막뉴스] '이게 대한민국 현실' 모두가 충격...이온음료 찾다 끝내"라는 제목의 보도이다. 뉴스에서 전한 내용을 다시 옮겨 전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 남성이 편의점 냉장고에서 이온 음료를 꺼내던 중 몸을 떨며 쓰러졌고, 신고를 받은 119 구조대원들이 도착해 들것에 실어 차에 태웠다. 남성은 집이 바로 앞이라며 데려다 달라 하였지만, 집에 도착하고 보니 돌봐줄 사람도 없고 환자가 쉬기에 적당치 않은 환경이었던 것이다. 소방은 병원 이송을 결정하였으나, 의료 파업의 여파 탓인지, 열네 군데 정도의 병원에 연락을 하였으나 모두 수용 불가라는 답을 들었다고 한다.
남성이 쓰러진 때로부터 두 시간 정도 흘러서야 국립중앙의료원에 도착하였는데, 너무 늦은 탓이었는지 열사병 진단을 받은 직후 숨지고 말았다. 뉴스 보도에서는 추가로 남성이 기초생활수급자였으며 "스스로 건강을 돌볼 여유도 없었고, 술에 의지해 살았"다고 전하였다. 이어서 "폭염은 이런 취약계층에게 더 잔인합니다"라는 말로 보도의 취지를 분명히 하였다.
깊게 뿌리 내린 신자유주의의 방식
재난은 평등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기후이상으로 인한 재난은 사회적 취약계층에 특히 더 위험하게 다가온다. 폭염과 같은 재난을 이제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사회적 재난으로 고쳐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앞서 소개한 남성의 사례를 살펴보더라도, 홀로 기초생활수급을 하는 환경에서 폭염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해당 소식을 전한 영상의 댓글에는 여러 좋지 않은 상황이 맞물려 결국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하게 된 이의 사연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사회 구조적 문제를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다수를 이루었다. 그러한 가운데 뉴스에서 전한 "술에 의지해"라는 대목에 방점을 찍어, 폭염으로 인한 죽음을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세우는 댓글과 그에 동조하는 목소리들도 있었다.
사회적 취약계층에 일어난 안타까운 소식뿐만 아니라, 산업재해 등과 같은 사건들을 전하는 기사에서, 우리는 그 책임을 피해를 입은 당사자 개인의 몫으로 전가하는 목소리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곤 한다.
사례를 하나 찾자면, MBC 뉴스 유튜브 채널에 7월 30일 올라온 "[단독] 제주 쿠팡 노동자, 2주 전 '업무 과중' 통화"라는 영상의 댓글을 살펴볼 수 있겠다. 해당 영상은 물류센터 노동자의 과로사 사건을 다루는 보도 내용이었는데,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라든가 '누가 일하라고 협박했나'라는 식으로, 노동 환경보다는 개인의 노력이나 선택 등을 문제 삼는 댓글들이 게시되어 있었다.
노력과 선택, 아울러 앞서 소개한 사례에서와 같이 '술'을 거론하며 금욕을 문제 삼는 등의 모습은 기이하게도 어딘가 퓨리턴과 닮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노력과 선택을 중요한 척도로 여기는 사고는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유와 그에 따른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가치관을 드러낸다. 자유에 따른 결과의 책임을 엄격하게 묻기에 이는 자연스레 금욕적인 윤리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유의 태도라든가 가치관을 적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이념들 가운데 하나가 신자유주의이다. 앞서 '기이하게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청교도적 사유의 태도를 오늘날 한국인이 남긴 인터넷 댓글에서 만나게 되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생활양식이나 사유의 습관에 신자유주의의 방식이 깊게 뿌리를 내린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노동자보다는 기업가에 보다 더 동질감을 느끼며 또 표현하고 있다.
다시 사랑의 기술을 펼치기 위해선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 자체는 권장할 만한 윤리적 가치로 보인다. 문제는 그러한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타자에 대한 공감이나 연대와 같은 감정이 희박해질 수 있다는 데에 있다. 특히 사회 구조적인 조건들을 외면한 채 모든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노력과 선택에 따른 것으로 환원해 버린다면, 인간을 개인으로 원자화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벽으로 가로막는 현상들 역시 계속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의 인간관은 개인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경영하는 기업가로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한다. 기업가 정신은 타인뿐만 아니라 기존의 자신과도 무한히 경쟁하도록 함으로써 자기 발전을 추구한다. 이는 경제 발전의 강력하고도 유용한 원동력으로 작동하기도 하였지만, 타자와의 상호의존에 대한 인식이나 협력에 대한 태도를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여러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곁에 있는 이들 혹은 우연히 조우하게 되는 타인까지 은연중에든 의식적으로든 잠재적인 경쟁상대로 여기도록 함으로써 '벽'을 세우도록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벽을 일컬어 시인 김남주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 바 있다.
이웃 몰래 침 발라 돈을 세는 소유의 벽
이데올로기에 눈이 먼 허위의 벽
자본과 권력이 쌓아올린 계급의 벽
벽을 보면 나는 치고 싶다
주먹이 까지도록
벽을 바라보면 나는 들이받고 싶다
이마가 깨지도록
- '벽' 중에서
소유의 벽, 허위의 벽, 계급의 벽. 이러한 벽들을 두고 시인이 "주먹이 까지도록" 나아가 "이마가 깨지도록" 치고 들이받고 싶다고 하는 까닭은, 이러한 것들이 모두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고 인간을 개인 안에 가두는 '증오의 벽'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미워하도록 할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싫어하고 이해하지 않도록 만드는 담벼락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벽들이 타자의 처지를 공감하는 일을 비롯해 함께 하는 삶에 대한 가능성을 상상하는 일을 가로막고 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곳에서 고통을 표현하는 목소리에 귀를 닫게 만들고 있다. 그렇게 증오의 벽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무한한 경쟁을 부추김으로써 자기 자신의 생존에만 골몰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타인을 향한 연대의 감정을 앗아가고, 공동체의 내일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빼앗는다.
증오의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김남주 시인은 우리에게 '사랑의 기술'(<사랑의 기술>)을 노래한 바 있다. 사랑의 기술은 "증오의 벽 무너뜨리는 기술"이자 "민중이 나라의 주인이 되게 하는 기술"이다. 아프다 말하는 목소리를 모두가 듣도록 함으로써, 모두가 누려야 할 마땅한 몫을 되찾아오도록 하는 움직임이다. 빼앗겼던 몫을 "제 것으로 찾아갖고"(<우리 시대의 사랑>) 오도록 하는 일이다.
이 땅에 다시 사랑의 기술을 펼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리는 벽을 우선 무너뜨리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 이를 위해서는 또한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벽도 함께 무너질 수 있게 하는 연습도 필요할 터이다. 김남주가 노래한 '사랑의 총공세'(<'지금 이곳'에서의 시는>)를 펼치기 위해선 바쁘게, 그리고 기쁘게 연습해야 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김태선 문학평론가입니다. 공동주최 : 김남주기념사업회·한국작가회의·익천문화재단 길동무 후원 : 더숲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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