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는만큼 ‘로열티’ 줄줄… 기술특허권 확보 시급
‘K-조선’이 국제해사기구(IMO)의 환경규제 강화와 스마트 선박 수주 증가에 힘입어 역대급 호황기를 맞이했지만 ‘특허 부족’이라는 한계에 부딪혔다. 국내 조선 업체들이 조선업의 근간이 되는 기술 특허를 미미하게 보유하면서 로열티(기술사용료)가 줄줄이 새어 나가고 있다. 수익성을 갉아먹는 고질적인 문제로 자리 잡은 것이다. 업계에서는 중국의 저가 공세로 한국 조선 업체들의 국제 경쟁력 약화 우려가 있는 만큼 중장기적으로 부수입원이 될 수 있는 지식재산권 확보에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중소 업체도 함께 경쟁력 있는 지식재산권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조선업은 노동집약 산업인 동시에 기술·지식집약 산업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인건비가 상승할 경우 조선업 경쟁력이 약화하는 것처럼 기술력이나 기술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만큼 불필요한 비용 출혈이 많아진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규모가 작은 기업이라도 수익성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선 원천 기술과 해당 기술에 대한 특허권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한국 조선업은 핵심 기자재 분야에서 해외 기술 의존도가 높다. 이는 특허 출원 현황에서 드러난다.
22일 한국지식재산연구원에 따르면 해외 유명 조선 업체의 경우 2001년부터 올해까지 미국이나 유럽 등 주요국에 유사한 비중으로 특허를 출원했다. 해외 선진 기업의 특허 출원 국가별 비중은 미국 29.6%, 일본 21.7%, 유럽 20.6% 등으로 특정 국가에 쏠리지 않았다. 스위스 ABB와 미국의 허니웰은 같은 기간 낸 조선 관련 특허만 4만5000개가 넘는다. 해외 조선사들이 적극적으로 지식재산권에 투자하며 기술 권리 보호에 집중한다는 방증이다.
여러 국가에 분산해 특허를 내면 기술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는 범위가 넓어진다. 다른 국가 기업으로부터 기술 침해를 받지 않을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거꾸로 다른 기업에 대한 무기로 활용되기도 한다. 기술 사용을 허락해주는 대신 막대한 로열티를 챙길 동력이 되는 셈이다. 또 업계 후발주자에게는 기술 진입장벽으로 작용한다. 신규 업체가 단기간에 기술 개발을 하기 어려운 만큼 특허를 보유한 기업은 경쟁력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
반면 한국 조선 업체들은 한국에 특허 대부분(76.3%) 출원하고 있다. 미국(3.6%)이나 일본(1.9%) 등 주요국에 특허를 출원하는 비중이 매우 낮다. 국제적으로 기술 권리 보호를 받을 여지가 적고 해외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 조선 업체들이 글로벌 기업에 기술료를 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일례로 국내 조선 업체들은 액화천연가스(LNG) 화물창 기술의 원천특허를 보유한 프랑스 기업 GTT에 막대한 로열티를 지불하고 있다. 서일준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국내 조선사들은 GTT의 화물창을 사용할 때 수주 금액의 5%를 로열티로 지급한다. LNG선이 3500억원일 경우 175억원이 프랑스로 유출된다. 전 세계 운항 LNG선 700여척 중 4분의 3을 국내 조선사가 건조할 때 앉아서 돈을 번 기업은 프랑스 기업이었던 것이다. 현재까지 국내 조선 업체들이 수주했던 LNG선과 관련해 GTT에 지급된 로열티만 5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과거 국내 조선 업체들이 GTT에 대항해 독자 기술을 확보하려고 역량을 집중했지만 물거품이 된 사례가 독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가스공사와 국내 대형 조선 3사(HD현대중공업·한화오션·삼성중공업)는 2004년 LNG 화물창 국산화를 위해 KLT(KC LNG 테크)를 공동으로 설립한 뒤 10년 동안 한국형 LNG 화물창(KC-1) 사업을 진행했다. 이 사업은 국책연구과제로 선정돼 총 197억원의 예산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KC-1 기술을 최초로 적용한 SK세레니티호에서 품질 결함이 발견되면서 현장 기술 적용은 중단됐고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KLT의 모회사인 한국가스공사는 투자금 153억원을 전액 손실 처리해야 했고, 조선소와 운항 선사가 입은 1880억원의 손실을 배상하라는 1심 판결을 받기도 했다. 조선 업계 관계자는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해 대기업이 나선 사업이었는데 뼈아픈 실패를 겪으면서 업계 전반적으로 기술 개발이 위축됐다”고 말했다.
민간이 다시 기술 개발에 나설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국내 조선 업체들의 원천기술 확보를 유도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업계에서는 중소 조선사, 기자재 업체들이 기술 개발 후 특허를 얻는 데까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패키지 지원이 필요하다고 본다. 중소 업체들은 자체적으로 지식재산권 전담 조직을 구성하거나 인력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 도움을 받아 원천기술을 확보한다면 기술이전, 라이선스 계약 등 기술 수출까지 노릴 수 있다.
유럽연합(EU)의 경우 ‘호라이즌 유럽’이라는 연구혁신 분야 재정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2021~2027년 중소기업의 연구·개발(R&D) 혁신 역량을 강화하고 성장을 이끌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여기에는 초대형 선박 관리기술을 지원하는 계획도 포함됐다. 이와 별개로 독일과 덴마크 등은 친환경 운송수단에 대한 투자를 지속하면서 기술 개발 및 특허 확보에 대한 지원을 추진하는 중이다. 한국 조선업의 최대 경쟁국인 중국도 기술력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중국은 제조 강국 도약이라는 목표 아래 지난 2015년 향후 30년간의 중장기 계획을 설정한 바 있다.
한국 정부는 지난해 11월 국내 조선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K-조선 차세대 선도전략’을 발표했다. LNG 화물창 기술의 국산화,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가 접목된 첨단선박 건조 인재 육성, 조선소 생산 혁신 등이 핵심 내용이다. 다만 지식재산권 창출 활성화 부분에서는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범태 한국지식재산연구원 연구위원은 “영세한 조선 기자재 업체를 대신해 지식재산권 관리 업무를 전담하고 특허를 공동으로 관리하는 정부 차원의 전담기구 설립 등 지원 방안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전성필 기자 f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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