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강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만 요코하마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USS 미주리 선상에서 일본 대표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망국의 대표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현장을 중계하던 아나운서는 “한국의 애국자에 의해 상하이에서 부상당해 의족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언급한 애국자는 윤봉길 의사였다. 그는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날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다. 시게미쓰는 그때 한쪽 다리를 잃었다. 윤봉길 거사의 출발은 이봉창 의사였다. 일본인이 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결국 독립운동이라는 외길에 섰다. 상하이에서 김구를 만난 뒤 인생이 뒤바뀐다. 그는 도쿄에서 일왕을 죽일 수 있다고 말한다. 김구는 이를 눈여겨봤고 결국 수류탄 두 개를 전한다.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도쿄의 궁성 앞에서 관병식에 갔다 돌아오는 일왕 일행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은 일왕 뒤를 따르던 수행원 마차에 맞았다. 이봉창에서 윤봉길로 이어진 거사는 독립을 염원하던 한국인들의 열망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됐다. 더욱이 장제스가 한국의 독립에 집중하는 순간이었다. 훗날 장제스는 전후 일본 식민지 문제를 다룬 카이로회담 때 독립운동가들의 의견을 반영한다. 당시 부칙에 실린 “노예 상태인 한국을 적당한 때에 독립시킨다”라는 내용 덕에 우리나라는 일제 패망과 동시에 독립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대심문관’으로 알려진 극시의 배경은 16세기 스페인 남부 세비야. 평소처럼 종교재판과 화형이 진행되던 어느 날이었다. 화형장으로 끌려가는 이들은 이유 없이 이단의 굴레를 썼을 뿐 평범한 이웃이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 인파 속에서 무한한 자비를 베풀었다. 스치기만 해도 병이 낫고 죽은 사람도 살아나는 기적이 벌어졌다. 예수였다. 대심문관인 추기경은 다시 온 예수가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경비병들을 보내 그를 체포했다. “네가 그자냐? 정말 그자인 것이냐?”라고 추궁하던 대심문관은 “왜 나를 방해하러 온 것이냐. 나는 너를 극악한 이단으로 몰아 화형에 처할 것이다”라고 외쳤다. 그러면서 “당신이 승천할 때 이미 모든 권한을 교황의 손에 넘겼고 이 모든 게 교황에게 달렸으니 때가 될 때까지 방해하지 말라”고 몽니를 부렸다.
주객이 전도된 발언을 일삼는 대심문관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가면 뒤에 스스로를 숨겼다. 그러면서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줬는지 따지기 시작했다. “기적을 보여주고 아무런 의심 없이 순종하게 할 것이지 왜 자유를 줘 방황하며 구원에 목매게 했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이처럼 무책임한 신을 대신하고 있는 우리가 칭송받아 마땅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야기는 클라이맥스로 이어진다. 장광설이 잠잠해지자 예수는 추기경의 핏기 없는 입술에 입을 맞춘다. 노인은 몸을 떨며 문을 열었다. “가라. 다시는 오지 말라”는 말과 함께. 예수와의 입맞춤을 통해 전율을 느꼈지만 ‘오지 말라’는 말로 선을 긋는다. 이처럼 상반된 행동은 전도자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던 추기경의 첫 마음을 소환했을지언정 자신의 ‘영화로운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아집을 동시에 보여준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를 밀어낸 추기경의 모습 속에서 일제강점기 때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우리 역사를 이제와서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들의 숱한 망언이 비친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건국절 논란 등의 유익은 뭘까. 결국 일제강점기 때 매국의 길에 섰던 이들의 역사를 지우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눈앞의 예수를 보고도 애써 밀쳐냈던 소설 속 추기경과 같은 모습은 아닌지 따져볼 일이다.
장창일 종교부 차장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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