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모두가 패자 되는 역사전쟁
2019년 이영훈의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이 화제가 됐을 때 ‘『반일 종족주의』를 위한 변론’이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제목이 ‘변론’이지만 사실 낚시성에 가까웠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치밀한 숫자와 자료로 논증을 시도하는데 우리 사회와 역사학계의 대응은 다분히 감정적이라는 아쉬움을 칼럼에 담았다. 성마른 주의 주장이 아니라 치밀한 실증과 논리라야 진짜 극복할 수 있다는 요지였다. 하지만 역시나 험한 댓글이 달렸고, 지인들로부터 “그래도 좀…” 같은 문자를 여러 통 받았다.
툭하면 역사전쟁으로 번지는 한·일 과거사 문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단편적 표현 하나로 논지가 곡해되거나, 인신공격을 받기도 한다. 사회적 압력이 지나치면 학문적 논의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으로 10년 넘는 명예훼손 소송전에 휘말렸다가 무죄로 마무리된 박유하(세종대 명예교수)의 경우가 좋은 예다. 정치·사회가 아카데미의 담장을 함부로 넘지 말라는 것이 판결의 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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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독립·건국 구분 안 되던 8·15
건국절 논란 얽혀 분열의 핵으로
민감한 역사문제 대중과 호흡해야
“반보만 앞서간다”는 지혜 새겨야
」
그러나 역으로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담 안의 학문은 보호받아야 하지만, 그 학문이 담을 넘어 바깥 세상으로 나올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현실로 뛰어든 이상 책임이 생길 수밖에 없다. 현실이 학문의 뜰로 난입하는 건 무도하지만, 학문이 조심성 없이 현실에 발을 내딛는 건 무모하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의 임명은 학문이 담을 넘은 경우다. 이종찬 광복회장이 반발하고, 결국 경축 행사가 두 쪽이 났다. ‘역사전쟁’이 시작됐다. 김 관장의 문제적 발언들은 사실 그 자체로는 하나하나 생각해 볼 만한 주제요, 학문적 논쟁거리다. “안익태가 음악가로서 만주국 건국을 축하하는 곡을 짓고 지휘했다는 이유만으로 민족 반역자가 되는가.” “백선엽의 간도특설대가 조선인 독립군과 싸웠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잘못된 기술로 친일로 매도되는 분들이 있어선 안 된다.” 독립기념관장 면접에서 “일제강점 시절 우리 국민의 국적은 일본”이라는 답변도 국제법적으로는 완전히 틀렸다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아카데미의 담 안에서라면 충분히 인정하고, 심지어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학문이 아니다. 독립기념관은 역사적 상징성을 띤 기관이다. 그런 곳에 굳이 역사 인식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인물을 앉혔다. 독립기념관장이라는 화자(話者)의 위치와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충돌하면서 듣는 이는 혼란스럽다.
윤석열 대통령은 “건국절 논쟁이 먹고살기 힘든 국민에게 무슨 도움 되냐”고 답답함을 토로했다고 한다. 백번 맞는 말이다. 과거 8·15는 그저 8·15였다. 해방, 독립, 건국, 광복의 의미가 구분되지 않았다. 그러다 2006년 한 신문에 실린 뉴라이트 이영훈의 건국절 제안이 분열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건국절 논쟁을 필두로 하는 역사전쟁이 진영 정치와 얽혀 소모전이 된 지 오래다. 진보좌파는 개인적으론 혐일주의자였던 이승만을 친일파로 몰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데 몰두하고, 보수우파는 정부 수립일인 1948년 8·15의 의미를 고양한다며 1945년 8·15나 임시정부의 의미를 축소한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역사전쟁은 모두가 패자가 되는 전쟁이다. 이겨도 상처뿐인 ‘피로스의 승리’다. 좌파는 편협한 민족주의에 갇히고, 우파는 대중과 괴리되면서 국민 분열이 확대 재생산될 뿐이다. 과거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미래로 나아갈 에너지를 낭비하는 악성 전쟁이다.
윤 대통령의 새 독립기념관장 임명은 본의든 아니든 역사전쟁을 촉발했다. 이종찬 광복회장의 과잉 반응까지 얽히며 기이한 광복절을 만들었다. 8·15 대통령 축사에는 의례적인 과거사 언급 한마디 없었다. 이튿날 KBS에 출연한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라는 말로 논란을 일으켰다. 독립기념관 외에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등에 뉴라이트 성향 인사들이 배치됐다.
한·일 관계 개선과 이를 통한 한·미·일 안보·경제 협력 증진이라는 목표에는 십분 공감한다. 하지만 민감한 역사 문제에 접근하는 정부의 손길이 지나치게 거칠다는 인상을 지울 길 없다. 광복절이 열리는 프로야구 경기에 일본인 투수를 올리지 말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광복절 새벽 방송된 오페라에 ‘기미가요’가 들어 있다고 난리가 나는 나라다. 결코 바람직한 열정이라곤 할 수 없지만, 국민과 호흡을 맞춰야 하는 정치로서는 유념해야 할 현실이다.
역사 문제만 나오면 가뜩이나 낮은 대통령 지지율이 더 떨어진다. 과거 지지세력이 자꾸만 등을 돌리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역사전쟁보다는 통합의 정치가 필요하다. 역사의 굴레를 벗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그 방식은 더 세심해져야 한다. ‘늘 국민과 함께하되 반보만 앞서 가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 혜안은 과거사 문제에서도 유효하다.
이현상 논설실장 leeh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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