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의 신 영웅전] ‘포만과 복종’의 통치…식민 전문가 크로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식민 통치의 성공 모델로 여긴 인물은 크로머 경이었다. 본명은 에벌린 배링 크로머(1841~1917·사진)였다. 독일계 이민의 후손인데, 가문은 영국에 정착해 금융업으로 크게 성공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그리스의 코르프 주둔군 포병대에서 근무하면서 고대 그리스·로마·이집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크로머는 다시 육군참모대학을 졸업한 뒤 전쟁성에 들어가 크림전쟁(1853~1856년)의 전후 처리 문제에 관여했다. 인도 총독 노스브루크(Northbrook) 백작의 비서로 봉직하면서 최고훈장을 받았다. 크로머는 온유함과 잔혹함을 겸비한 수재였다.
1877년 크로머는 이집트의 금융 위기를 타개하고 대영 항쟁을 진압하기 위한 특수 임무를 갖고 카이로영사관에 영사로 부임했다. 그는 미국 남북전쟁의 호기에 이집트 면화를 수출해 이집트의 금융 위기를 해결했다.
그뿐 아니라 수에즈 운하 건설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처럼 탁월한 능력을 보이자 영국은 크로머를 이집트 책임자(1883~1907)로 임명했다. 그의 공식 직함은 이집트 주재 총영사(Controller-General in Egypt)였다.
크로머에겐 식민지 통치 원칙이 있었다. 차관(借款)으로 약점을 잡은 다음 식민지 백성을 배부르게 해 복종시키고(full-belly policy), 세금을 낮춰 민심을 사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집트를 수탈하면서도 가책을 느끼기보다는 백인의 의무라 여겼다.
크로머는 논리적인 프랑스나 권위주의적인 독일은 이런 일을 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포만(飽滿) 정책’은 이토의 유훈이 되면서 일제의 조선 통치에 근간이 됐다. 1920년대 한국인의 경제 수준은 1950년대보다 높았다. 지금도 이집트인들이 영국에 가는 것은 관광이나 학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크로머의 무덤에 침을 뱉으러 간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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