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동안 학원 가지 마" 충동적인 결정, 그 결과는?
[이준수 기자]
▲ 아무 계획이 없는 방학 중에는 자연에서 자주 쉬었다. |
ⓒ 이준수 |
우리의 허술한 실체를 알고 있는 분들은 '그렇게 설렁설렁 키우면 안 불안하냐'며 걱정하신다. 그렇지만 송충이가 솔잎을 먹지 않으면 탈이 난다. 우리는 빡빡하게 일정을 돌리는 것보다 멍때리는 편이 편안한 사람이므로 이번에도 좌고우면하지 않고 놓았다. 대신 학교나 학원이 해 주는 일을 가정에서 감당할 각오는 해야 했다. 3주를 겨우 채우는 짧은 방학인데 별일이야 있겠어? 용감한 시작이었다.
방학 기간 풀타임 돌봄이 가능한 이유는 아내와 내가 모두 초등교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아에 약간의 죄책감이 있다. 학기 중에는 반 아이들을 챙기느라 우리 집 아이들 공개수업이나 운동회에 참여하지 못했다. 유치원 무렵에도 그랬고, 학교에 들어간 지금도 마찬가지다. 직업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우리 집 아이들은 서운해한다. 어른의 사정을 짐작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인 것이다.
'남이 해주는 밥'의 위대함
방학은 참 이상한 기간이었다. 방학에 돌입하기 전에는 느긋하게 쉬는 이미지에 들떴다가, 막상 방학 기간에는 의외로 바빴다. 일단 네 명의 가족이 삼시 세끼를 먹으려면 엄청난 노동이 필요했다. 장 보고, 요리하고, 설거지와 분리수거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었다. 사람이 숨을 쉬는 한 시간은 흐르고, 밥때가 찾아온다. 네 가족의 식사량은 결코 적지 않았다. 식단에 변화를 주고 먹을 만한 수준으로 조리하기 위해 땀을 뻘뻘 흘렸다. 나와 아내는 다음 끼니 공포증에 걸릴 지경이 되었다.
규칙적으로 나오는 급식에 익숙해 있던 우리는 '남이 해주는 밥'의 위대함을 잊고 있었다. 학기 중에는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급식을 넉넉히 먹었다. 급식은 영양적으로 균형 잡혀 있고, 맛있으며, 수고스럽지도 않다. 우리 집 아이들은 간식까지 살뜰히 제공되는 급식에 열광했다. 그런데 방학 중 집에서 제공되는 식사는 급식의 질에 미치지 못했다.
우리 부부 또한 푹푹 찌는 여름에 시원한 콩국수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전문 국숫집의 고소하고 진한 잣콩국수를 가정에서 구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우리 가족은 식비 예산을 세워 생활한다. 과소비를 막기 위해서이다. 그렇지만 올여름은 외식 빈도가 늘면서 식비가 훌쩍 늘었다. 결국 부부 용돈을 헐어 충당해야 했다.
사람의 인생을 두고 '먹고사는 일'이라고 한다. 방학 중 두 아이를 이십사 시간 끼고 살면서 '먹고사니즘'의 의미가 절실히 와닿았다. 내 힘으로 밥을 먹으며 살아가는 일상은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나 아이의 건강을 고려해서 신선한 식재료와 간식을 먹이려면 품이 두 배로 들었다.
▲ 로컬 푸드 마켓에서 구입한 유기농 산 수박. |
ⓒ 이준수 |
우리 가족은 야외 활동에 지쳐갔다. 그날그날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로운 방학을 만끽하리라 호기롭게 외쳤지만 올여름은 '더위 생존'이 최우선 과제였다. 바다 수영을 다섯 번 하기로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는데 모두 취소했다. 골이 울리는 땡볕에 아이는 생기를 빼앗겼다. 달궈진 백사장은 발바닥을 고문하듯 지졌다. 우리는 그늘을 찾아 미술관, 영화관, 과학관으로 숨어들었다.
우리 집은 좀처럼 에어컨을 켜지 않는다. 집에 있기 힘들 만큼 더울 때는 차라리 나가서 공동 시설을 이용하자는 주의다. 문화생활도 하고, 냉방 에너지도 아끼고 일거양득이다. 무엇보다 실내에 가만히 있으면 운동부족이 되기 쉽다. 장보기도 온라인으로 하지 않고 일부러 오프라인 매장을 활보했다. 걸음 수를 늘리기 위해 아이들 몰래 동선을 복잡하게 꼬아 식재료를 담았다.
공연과 전시, 마트 장보기만으로는 하루의 긴 시간을 채울 수 없었다. 집에 있기는 싫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우리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은 휴관일인 월요일을 제외하면 언제든 열려 있었다.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집에서 몸을 배배 꼬며 회피하는 방학 숙제를 도서관에서 곧잘 했다. 모두가 책에 푹 빠져 있으니 자연스레 동기부여가 되는 모양이었다.
우리 부부는 도서관 지하에 있는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며 아이들을 꼬드겨 자주 책을 읽으러 갔다. 아이가 책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순간은 부모의 취미 시간이기도 했다. 도서관은 안전한 공간이므로 놀이공원처럼 밀착 돌봄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동도서 말고 나도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쉬었다. 쾌적한 환경에서 책을 읽으니 정말 행복했다.
학교를 가지 않고, 학원도 멈춘 기간에 도서관은 우리 가족의 소중한 배움터가 되었다. 도서관이 없었더라면 아이들의 학습을 챙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와 달리 교육 의지가 강하고 자녀 지도에 요령이 있는 분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녀교육을 성공적으로 해낸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은 머무는 장소나 시간,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다. 집에서 억지로 아이와 싸워가며 공부를 강요하는 것보다 도서관이나 책방으로 나가는 편이 훨씬 쉽다. 우리는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장소'를 옮김으로써 행동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웠다.
▲ 도서관 휴관일이면 단골 책방 구석에서 책을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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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에는 가족들이 사는 지역으로 여행을 떠났다. 서울에는 아이들의 고모가, 울산에는 아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다.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길어서 식생의 변화가 뚜렷하다. 울산 여행 중 부산을 거쳐 거제로 당일치기 나들이를 다녀왔다. 강원도 고산지에는 침엽수 비중이 높은데, 남쪽 바다에는 활엽수가 눈에 띄었다. 물 색깔도 달랐다. 동해가 깊고 짙은 푸른색이라면, 남해는 보석 비취색으로 빛났다.
자연환경에 따라 먹는 음식도, 문화도 조금씩 차이가 났다. 아이들은 경상도 사투리가 표준어처럼 자리 잡은 곳에서 외국에 온 듯 귀를 쫑긋 세웠다. 둘째 표현에 따르면 중국어와 일본어를 섞어 놓은 말투지만 자세히 들으면 한국말이라서 이해할 수 있다나.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 속에서 엄청난 땀이 흘렀다. 앞으로 더 뜨거워질 지구를 생각하니 비행기를 덜 타고 싶어졌다. 우리 가족이 몇 번 비행기 안 탄다고 해서 지구의 대기 구성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이 서서히 늘어나면 미래가 달라지지 않을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과 날씨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다. 다음번에 도서관을 방문하면 기후 위기를 다룬 책을 빌리기로 했다.
일상은 여행처럼, 삶은 예술처럼. 3주간 아이들을 온종일 끼고 살면서 일상이 여행처럼 다가왔다. 익숙한 패턴으로부터 멀어져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기후 변화가 평범한 사람의 평화로운 하루를 파괴할 정도로 강력해졌다는 사실이다. 나만, 우리 가족만 잘 대비하면 지구가 어떻게 되든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오만한 믿음은 반드시 깨질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 가족은 돌아오는 겨울 방학에도 '텅 비워 놓고 마음 가는 대로 홈스쿨링'에 도전할 예정이다. 겨울에는 어떤 풍경이 낯설게 보일까. 우리 부부도, 아이들도 학교와 학원에 나가지 않았으나 더 중요한 것을 배운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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