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자재 마트 계산원이 가장 듣고 싶은 말

김아영 2024. 8. 21. 15:4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앉아서 일할 권리 있는데 '손님 오면 반드시 일어서서 인사하라'는 상사... 저만 이상한가요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김아영 기자]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데서 일하니까 좋겠네?"

계산원으로 일하면 사람들로부터 종종 듣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매장 안은 기본적으로 냉난방이 돌아가니까. 하지만 그 말이 기분 나쁜 이유는 말투에 은근히 계산원의 노고를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오래 서서 일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한 자리에 서 있는 게 보기보다 그리 평화로운 풍경이 아니라는 것을. 실제로 계산원 중에 하지정맥류, 족저근막염을 비롯한 근골격계 질환을 겪는 사람이 흔하다. 물론 최소한의 법적 보호는 있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80조(의자의 비치) : 사업주는 지속적으로 서서 일하는 근로자가 작업 중 때때로 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해당 근로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의자를 갖추어 두어야 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법적으로 명시됐다고 해서 현실에서 100% 그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건, 아마 누구나 알리라. 누구에게나 익숙한 일이고, 계산원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다만 외국에서는, '앉아서 일하는 계산원이 일반적'이라는 경험담을 마주할 때마다 부러울 따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앉아서 일하는 계산원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아직도 파다하다. 내가 겪은 바로는 손님보다 고용주가 더하다. 지금까지 열 곳 가까이 계산원으로 일하면서 간이 의자를 놓아준 곳은 단 두 곳이었다. 그마저도 편하게 쓸 수 없이 눈치를 주었고, 나중엔 오며 가며 하는 데 거치적거리는 짐이 되길래 내가 내 손으로 구석에 치워 놓았다.

등만 기대도 날아오던 못마땅한 눈길
 일하는 게 힘든 것은 누구에게나 같다. 그런데 어떤 노동자들에게는 의자조차 허락되지 않는다.(자료사진)
ⓒ 픽사베이
5~6년 전 내가 몸담았던 편의점에서는 휴게시간 없이 8시간을 연속해서 일한 적도 있다. 그때 의자는 언감생심이고, 잠깐 뒤로 벽에 등을 기대는 것조차 엄하게 경고를 받곤 했다. 무릎과 발이 너무 아파서 나도 모르게 벽에 등을 기대면 점장님이 대놓고 한숨을 쉬며 내게 못마땅한 눈길을 던졌다. 이러다 보니 퇴근할 즈음엔 다리와 발이 퉁퉁 부어 금방이라도 자리에 쓰러질 정도로 진이 빠졌다.

또 다른 편의점에서는 CCTV로 실시간 감시를 받았다. 그게 불법이라는 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편의점은 계산대 바로 옆에 문 없이 창고 입구가 연결된 구조였다. 나는 손님이 없을 때 틈틈이 창고 안쪽으로 들어가 플라스틱 우유 상자를 뒤집어 엉덩이를 붙이고 쉬었다. 그러다가도 손님이 들어오면 바로 일어나 계산대 앞에 섰다.

그런데 그게 사장님 눈에는 불성실한 행동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사장님이 원하는 건 마치 무쇠 다리를 장착한 듯 근무 시간 내내 반듯이 서서 손님을 맞이하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나는 사장님에게 지적당한 후, 아무리 다리가 아파도 꿋꿋이 계산대 앞에 서서 손님을 맞았다.

이후 손님이 조금만 신경에 거슬리는 행동을 해도 짜증이 났고, 자발적으로 친절을 베푸는 여유 따위는 아예 사라졌다. 나날이 신경절적으로 변하는 내 모습이 싫어서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일을 관뒀다.

이런 경험이 쌓이다 보니 나조차도 근무 중 앉는 것은 양심에 찔리는 잘못된 행위라는 인식이 박혀버렸다. 사회의 비인간적인 기준을 스스로 내재화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편의점에 들어갔을 때 아르바이트생이 앉아 있으면 '농땡이' 피우는 것처럼 보여서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데 이런 나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나조차 깜짝 놀란다. 속으로 '내가 왜 이러지. 저 사람 입장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면서' 하는 생각을 하고서는 조금 서글퍼졌다. 사장으로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어쩌다 직원인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장님들의 시선을 베껴버린 걸까.

설령 그것이 정당한 요구일지라도, 이의제기라고는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말 잘 듣고 만만한 알바생으로 살아온 과거가 지금의 나를 빚어낸 셈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전혀 자랑스럽지 않았다.

손님은 부모가 아닌데
 슈퍼마켓에서 계산대에 앉아 일하는 직원.
ⓒ elements.envato
지금 근무 중인 식자재 마트에서도 원래 의자가 없었다. 그러다 근무하고 반년쯤 지났을 때 의자가 생겼다. 사실 의자라고 부르기엔 실소가 나오는 임시 의자였다. 바로 접이식 사다리 위에 상자를 덧대고 테이프로 칭칭 감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보기에 우스우면 어떠랴. 다리가 떠받치는 체중을 잠깐이라도 덜어낼 수 있다는 도구가 생긴 것이 계산원인 나는 기쁘기만 했다. 나는 연달아 계산을 마치고 나면 의자에 걸터앉아 한숨을 돌렸고 종량제 봉투를 낱장으로 접을 때, 담배 진열장을 채울 때에도 앉아서 작업했다.

손님이 들어올 때도 굳이 일어서지 않고 앉아서 인사를 드렸다. 손님이 올 때마다 일어서면 의자를 이용하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 온 점장님의 생각은 달랐다.

"인사할 때는 일어서서 해야지. 그게 기본이야."

내 귀에 유독 '기본'이라는 단어가 아프게 꽂혔다. 손님이 계산대로 오시면 곧장 일어나서 응대했는데, 말 한마디에 졸지에 기본도 안 된 계산원이 되어버린 게 억울했다.

식자재 마트에서는 손님이 말 그대로 수시로 드나든다. 그때마다 일어서서 인사하라는 건 사실상 앉지 말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손님 시선에서 보더라도 계산원이 "어서 오세요." 한 마디 하고 도로 앉으면, 서로 부담스럽고 부자연스러워 보일 수밖에 없다. 이렇다 보니 인사하려고 한 번 일어나면 다시 엉덩이를 붙이기 어려웠고 의자를 이용하는 횟수는 자연스럽게 점점 줄어들었다.

점장님의 말이 왜 이렇게 거슬리고 머리에 맴도는 걸까. 곰곰이 궁리하다가 뜬금없이 초등학생 때 다닌 한문학원이 떠올랐다. 그때 사자소학을 배웠는데 그 중 이런 내용이 있었다.

父母出入 每必起立(부모출입 매필기립)

부모님께서 출입하시면 매번 반드시 일어서라.

아, 일어서서 인사하는 게 예의라는 인식의 출처가 여기였구나. 부모가 집에 오면 자식된 도리로서 마땅히 일어서서 인사할 수 있다. 하지만 손님은 부모가 아니다. 손님은 손님일 뿐이다. 왜 충효사상을 담은 뿌리 깊은 고전까지 끌고 와서 손님에게 지나친 예의를 차려야 하는가.

아무리 계산원의 앉을 권리가 공론화 되어도 실제로는 서 있는 자세를 계산원의 기본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이 오히려 계산원 본연의 업무인 계산 작업의 능률을 해친다하더라도 말이다. 단지 그것이 보기 좋다는 불합리한 시선 때문에 오늘도 계산원의 피로는 불필요하게 가중된다.

언젠가 서 있는 계산원들을 이상하게 여기는 날이 오길, 그래서 손님이 나에게 "왜 서 계세요?"라고 묻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언제 봐도 서서 인사를 건네는 계산원의 행동이, 흐뭇한 친절로 여겨지는 게 아니라 어색하고 과장된 장식처럼 보이길 바란다.

이것이 오로지 계산원의 손에만 달린 미래일까. 아닐 것이다. 계산원이 '앉아서 일할 권리'를 백 번 외치는 것보다, 소비자인 손님들이 계산원이 앉아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친절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고 공감대를 보여주는 것이 변화를 더 일찍 앞당길 것이다.

십 년이 넘게 계산원으로 일하면서, 예나 지금이나 앉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눈 앞의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참고로 2주 전부터 우리 마트엔 간이 의자가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