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아내가 죽은 후, 그 택시기사의 삶

오길영 2024. 8. 21.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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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길영의 뾰족한시각] <디 애프터> 와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보여준 '애도의 과정'

[오길영 기자]

내가 맡은 대학(원) 강의에서 종종 정신분석학을 다룬다. 이론이 아니라 실제 치료를 담당하는 임상으로서 프로이트,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뇌과학이나 신경과학의 발전에 따라 그 유효성을 많이 잃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고 상처 입고 회복하는지를 인간관계 속에서 성찰하려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그런 점에서 흥미로운 글이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증>이다. 굳이 정신분석학에 기대지 않더라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상실을 겪는다. 상실은 고통을 낳는다. 그래도 인간은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 혹은 혹은 애정을 투사한 대상을 잃었을 때 슬픔에 빠진다. 연인, 가족, 국가, 자유, 이상 등 어떤 이유로든 살아가면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상실의 대상이 된다.

그런 상실조차도 깊은 애도의 과정을 거쳐 서서히 상처가 아문다. 하지만 애도가 이뤄지는 시간은 사례마다 다르다. 모든 죽음은 슬프지만,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자식의 죽음은 쉽게 회복되기 힘든 마음의 상처인 트라우마를 남긴다.

우리에게 지옥이 필요한 이유
 단편 영화 <디 애프터> 스틸컷
ⓒ 넷플릭스
지인이 알려줘서 스트리밍 서비스로 본 단편 영화 <디 애프터 the After>는 애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불과 18분밖에 안 되는 짧은 영화지만 보고 나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그리고 묻게 된다. 사람은 어떻게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가? 어떻게 상실을 애도하는가? 납득할 수 없는 죽음이 많은 한국 사회이기에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2024년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단편 영화 후보작이었다. 줄거리가 별 의미 없고 장면 하나하나를 돌아봐야 하는 영화지만, 내용은 이렇다. 바쁜 사회생활로 딸과 아내와 함께 시간을 못 보내던 주인공 다요(데이비드 오옐로워)는 눈앞에서 무차별적 살인을 일삼는 괴한에 의해 딸과 아내를 잃은 후 깊은 슬픔의 시간을 버틴다. 1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다요는 택시를 운행하며 살아간다.

다양한 사연과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 그의 택시에 탄다. 다요를 의식하지 않고 승객이 하는 이야기는 다요가 경험했던, 하지만 이제는 잃어버린 시간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고조되던 다요의 감정은 딸의 생일날 태운 어느 가족 때문에 폭발한다.

택시에 탄 부부는 다요의 죽은 딸과 비슷한 나이의 소녀를 사이에 두고 말다툼한다. 카메라는 그 사이에서 우울해하는 소녀와 말없이 소녀에게 공감하는 다요를 비춘다. 부부의 집에 도착한 뒤 소녀가 갑작스럽게 다요를 뒤에서 안아줄 때, 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무너진다.

이 영화를 보면서 새로 번역본이 나온 19세기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 시집 <나는 무명인! 당신은 누구세요?>(김천봉 옮김, 소명출판)에 실린, 죽음을 다룬 시들이 떠올랐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명이다. 디킨슨의 시는 <디 애프터>가 보여주는 죽음의 트라우마, 애도의 과정을 순서대로 보여준다. 우리도 삶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과정이다.

<디 애프터>에서 다요는 택시(공유 차량)를 몰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다요와 승객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승객은 다요가 겪었던 고통을 알 수 없다. 그들은 각자의 일상을 살아간다. 섣부른 이해와 공감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혹시 내가 죽더라도/ 늘 그래왔듯 평소처럼/ 당신은 살아가고/ 시간은 계속 흐르고/ 아침은 빛나고/ 한낮은 불타리라./ 새들은 일찍부터 집을 짓고/ 벌들도 부산하게 돌아다니리/ 누구나 지상 모험을 즐기다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법!"(에밀리 디킨슨, <혹시 내가 죽더라도>, 아래 시 제목만 병기)

'나'의 죽음과 '당신'의 삶 사이에는 다른 시간의 강이 흘러간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마지막에 등장하는 소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다요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각자는 자신의 "지상 모험을 즐기"기에 바쁘다.

영화에서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그리고 그렇게 묘사하지 않는 과감한 생략에서 <디 애프터>의 압축적인 힘이 발생하지만, 딸과 아내의 죽음 이후 다요는 이런 시간을 겪었을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 장례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조문객들이 왔다 갔다/ 계속 밟고, 밟아대는 바람에,/ 감각이 완전히 부서지는 것 같았다./ (중략)/ 난파되어, 외로이, 여기에 버려진 듯이./ 그 와중에 이성의 받침대가 부서졌고,/ 나는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추락할 때마다, 어떤 세상을 들이받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결국." (<내 머릿속에서, 장례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장편 영화였다면 이 시가 묘사한, 다요의 삶을 상세히 보여줬을 것이다. 그러나 <디 애프터>는 그 과정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더 강하게 "감각이 완전히 부서지는 것 같았"고 "난파되어, 외로이, 여기에 버려진", 다요가 겪는 고통을 관객이 실감하게 만든다.

다요가 영화의 마지막에서 무너지는 모습은 디킨슨 시의 구절을 정확히 이미지로 보여준다. 죽은 딸을 연상시키는 소녀의 모습, 그 소녀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모르고 다투는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다요의 "이성의 받침대가 부서졌고,/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추락할 때마다, 어떤 세상을 들이받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결국."

상실의 고통을 겪은 이에게 주변 사람은 그만 잊으라고 말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위로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깊게 베인 마음의 트라우마는 그에게는 거의 지옥의 고통과 같다.

"내 삶은 닫히기 전에 두 번 닫혔다./ 아직은 두고 봐야겠지만/ 불멸이 베일을 벗겨서/ 내게 보여줄 세 번째 사건도/ 두 번 닥친 그것들처럼/ 품기에 너무 거대하고, 너무 절망적일지는/ 이별은 천국에 대해 우리가 아는 전부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옥이 필요한 이유다"(<내 삶은 닫히기 전에 두 번 닫혔다>).

이별을 겪은 사람이 그 고통을 극복하려면 이별 혹은 죽음이 죽은 사람에게는 천국이라고 스스로를 억지로라도 위로해야 한다. 우리가 조문하면서 늘 세상을 떠난 이의 명복을 비는 이유다. 명복은 저 세상에서의 복, 곧 천국의 복을 말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에게 이별은 지옥이다. 그러면 왜 "지옥이 필요한 이유"라고 시인은 못 박을까?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뎌야만 애도가 끝나기 때문이다.

애도의 과정을 생략한 한국 사회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 <나는 무명인! 당신은 누구세요?> 겉표지
ⓒ 소명출판
<디 애프터>에서 다요가 애도의 종결에 다다랐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무너진 자신을 추스르며 택시를 몰고 떠나는 그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다요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알게 되었으리라는 인상은 받는다.

"사람들이 사라진다는 걸 알았다/ 겨우 어린아이였을 때는/ 멀리 떠났으려니, 황량한 지역에/ 정착했으려니 상상하였다./ 이제는 그들이 떠나 황량한 지역에/ 정착했다는 것뿐 아니라/ 다 죽어서 그랬다는 그 어린아이에게/ 감췄던 사실까지 다 안다!"(<사람들이 사라진다는 걸 알았다>)

우리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감췄던 사실"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죽음의 의미를 숙고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몸은 어른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겨우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다요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에 불과한가? 이 짧은 영화가 던져준 울림은 다요가 겪었던 고통이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라면 과장일까?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 주변에는 애도 받지 못한 죽음과 상처가 두꺼운 지층을 이룬다.

세월호의 죽음은 제대로 애도의 과정을 거쳤나? 이태원의 죽음은? 채 상병의 죽음은? 진실을 덮고 시간을 보내면 그냥 그 죽음이 잊히나? 정신분석학이 알려준 교훈은 제대로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억압된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권력이든 무엇이든 힘으로 누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세게 누를수록 더 큰 반동으로 되돌아온다. 특히 그 죽음이 개별적인 원인이 아니라 집단적, 사회적, 국가적 책임과 관련되어 있다면 애도의 과정도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집단적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죽음의 원인을 정확히 해명하고, 슬퍼할 때 제대로 슬퍼해야만 서서히 한 사회와 국가가 겪은 트라우마가 치유된다. 그런 치유의 과정을 겪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사회의 구성원이 "어린아이에게 감췄던 사실"을 아는 정신의 어른이 되어야 한다. 특히 힘을 가진 이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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