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중심에 선 아시아… 한국 비엔날레가 달라졌다
가벽은 대포알이라도 지나간 듯 뻥 뚫려 있다. 내부 바닥에는 널빤지로 이리저리 덧댄 구조물이 놓여있다. 난파된 해적선을 수습한 임시 쉼터 같은 이 설치작품은 전시 후 철거된 쓰레기를 가지고 만들었다.
부산비엔날레가 지난 17일 대장정에 들어갔다. 개막 전 16일 프리뷰에 다녀왔다. 메인 전시장인 부산 사하구 을숙도 부산현대미술관 전시장 1층에 들어서면 정유진 작가의 이 설치 작품 ‘망망대해로’가 전시 주제를 압축하듯 관객을 맞는다. 공동 감독인 뉴질랜드 출신 베라 메이와 벨기에 출신 필립 피로트가 내세운 주제는 ‘어둠에서 보기’. 둘은 이를 위한 방법의 한 축으로 ‘해적 유토피아’를 내세웠다. 해적은 이주민, 난민, 노동자 등 주류 사회에서 낙오된 이들이 모인 집단 아닌가. 정부와 자본의 손이 닿지 않는 해방구에서 이들이 만든 자치 사회가 해적 유토피아다. 정유진의 작품은 그걸 은유한다.
비엔날레에는 36개국 62작가(팀)가 초청 받았다. ‘해적’이라는 전복적이고 반사회적인 용어를 끌어왔지만 전반적인 인상은 차분하다. 이것은 어둠에서 보기의 또 다른 축으로 ‘불교적 도량’을 내세운 것에서 기인할 수 있겠다. 도량은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정체성 비워내기”라고 감독들은 설명했다. 작가 송천이 그 유명한 ‘물방울 관음’과 이를 패러디한 ‘물방울 성모 마리아’를 나란히 제작해 내건 종교화가 이러한 관용적이고 성찰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해적의 외침’이 약화된 데는 전시 방식의 매스매치에서도 연유하는 측면이 있다. 전시장 밖에 있어야 할 작품이 실내로 들어오고, 규모마저 축소되면서 스케일의 맛을 잃어버려서다. 로비에 도입부처럼 서 있는 대나무 송신탑은(조 네이미 작품)은 실내가 적절하지 않다. 2022년 독일 카셀 도큐멘타 때 야외에 설치됐던 인도네시아 반체제작가 그룹 타링 파디의 작품도 실내로 들어오면서 제맛을 잃었다. 타링 파디는 정부의 농산물 가격 정책에 반대하는 농민 시위를 담은 대형 걸개그림과 함께 개별 농민을 누런 종이 상자 뒷면에 등신대 크기로 그려 설치했다. 그런데 카셀에서는 땅바닥에 꽂혔던 등신대 인형이 실내에 들어오면서 벽돌로 고정됐다. 날것의 목소리도 덩달아 힘을 잃었다.
그럼에도 이번 부산비엔날레는 두 가지 점에서 주목된다. 통상 한국의 비엔날레는 기후위기 같은 유행하는 주제, 부산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이 갖는 주제 등을 짬뽕식으로 버무려 ‘안전하게’ 가는 경향이 있었다. 이번에는 거대 자본에 대한 반기, 그것이 끼친 해악에 대한 대안 추구 등 주제가 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다.
또한 한국의 비엔날레에서 처음으로 아시아 작가가 중심으로 쳐들어왔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한국의 비엔날레는 개최지가 한국임에도 서구의 간판급 동시대 미술작가를 포진시키고 그 주위에 구색 맞추듯 중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를 참여시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참여 작가 62명(팀) 중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가 절반을 차지한다. 중동·아프리카를 포함하면 10명 남짓을 제외하곤 전부가 비서구권이다.
뉴칼레도니아 출신의 나탈리 무챠마드는 에스파냐 항해가 마젤란의 노예이자 통역사였던 수마트라 출신 엔리케를 조명하는 설치 작품을 통해 마젤란을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으로 기록한 서구 중심 역사를 전복시킨다.
신학철 작가는 촛불 시위 등 한국근대사 시리즈를 내놓았고 이에 조응하듯 일본의 이시카오 마오는 오키나와의 역사를 사진으로 찍어 두루마리처럼 펼쳤다. 방정아 작가는 세월호를 추모하는 그림을 내놓았다. 태국의 프라차야 핀통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투하한 폭탄의 불발탄으로 거울을 만들었다. 역시 태국의 소라윗 송사타야는 멸치, 다포리 등을 담은 상자와 넝쿨을 오선지에 그린 악보처럼 설치해 유년시절 삼촌의 어장 공장에서 맡았던 후각적 기억을 전시했다. 국가의 역사와 개인사가 오버랩 된다.
전시장 작품 안내 캡션의 글씨가 너무 작아서 가독성이 떨어지고 작가의 국적을 언급하지 않는 등 디테일이 부족한 것은 개선되어야 할 점이다. 옛 한국은행 부산점을 개조한 부산근현대역사관 등에서도 전시한다. 10월 20일까지.
부산=글·사진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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