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 엔딩부터 살아본다면
미리 쓰는 유언장 문화 확산
자신의 부고기사 써보기 제안
남은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아프지 않을 건강수명 65.8세
허투루 쓸 시간과 에너지 없어
오랜 투병 끝에 생의 끝자락을 직감한 그는 성대한 행사를 준비했다. 2년 전 서울의 한 호텔에 지인들을 초대했다. 당시 77세,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자리였다. 1990년대 홍보업계의 전설이자, 우리나라 1세대 여성 사업가로 불린 조안 리 이야기다. 이틀 전까지 병상에 누워 있던 그는 눈부신 드레스를 입고 등장해 ‘감사’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나눠줬다. 사비로 제작한 비매품으로 오직 자신의 삶에 의미 있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전달했다. 행사장엔 대형 축하 케이크가 놓였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미국에 사는 두 딸도 참석했다.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알고 있었다. 다시는 그를 보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조안 리는 입원하지 않고 일상을 보내다가 3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그날의 자리, 사실상 사전 장례식이었던 셈이다.
미리 유언장을 쓴 이도 있다. 코로나19가 시작된 2020년 초, 당시 52세였던 그는 몸과 마음이 건강할 때 유언장을 작성하자는 오랜 결심을 실천했다. 세계 최대 컨설팅 회사 에델만 사장을 역임한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다. 그는 전문 변호사에게 조언을 구해 3개월에 걸쳐 유언장을 작성한 뒤 두 명의 증인을 세워 공증을 받았다. 그 안에는 부고 기사 초안도 포함돼 있다. 건강하고 즐겁게 살다가 70대에 세상을 떠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장례식 대신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음악을 들으며 추억해 달라고 했다. 그는 ‘건강할 때 유언장을 쓴 이유’라는 자신의 책에서 “나의 유통 기간이 끝나는 시점을 미리 돌아보게 되면 지금 여기에서의 내 삶이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맞이할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이며, 이를 어떻게 준비하느냐가 삶의 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내년이면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 이상인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다. ‘웰다잉’ 즉 ‘잘 죽는 것’에 대한 관심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아닌 존엄성과 품위를 갖고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대체로 갑자기 닥치며 남은 가족들은 황망하고 경황없는 상태에서 고인을 떠나보낸다. 현재의 장례식에서는 고인에 대한 추억이나 남은 자의 회한을 오롯이 느끼기 쉽지 않다. 물질주의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례 문화는 바뀔 때가 됐다. 영화배우의 장례식장엔 영화 포스터가 걸리고, 축구 선수의 장례식장엔 붉은악마 유니폼을 입은 조문객이 와도 괜찮지 않을까.
사전 장례식이나 변호사를 대동한 유언장 작성은 거창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건강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삶을 차분히 정리해 보는 시간은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자신의 부고 기사를 써보기를 제안한다. 방법은 어렵지 않다. 신문에 나는 부고 기사처럼 “○○○는 ○○○○년, 어디서 몇 남 몇 녀 중 몇째로 태어났다”로 시작하면 된다.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고,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내가 성취한 것은 무엇인지, 삶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누구를 사랑했는지를 적어보면 된다.
이를 쓰다 보면 마음에 드는 삶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니어도 괜찮다.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것이니까. 인생 2회차의 부고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남은 삶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쓰이길 바라며 살아가면 된다. 죽음을 가정하고 써보는 부고는 결국 어떻게 살겠다는 이야기이므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때론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삶은 유한하다. 2022년에 태어난 신생아의 기대 수명은 82.7세이며, 이 기간 중 아프지 않고 살 수 있는 건강 수명은 65.8세다. 은퇴를 앞둔 2차 베이비부머 세대(1964~74년생)의 건강 수명은 5~15년 정도 남았다는 뜻이다. 60세에 퇴직한다고 했을 때, 건강하게 돌아다니며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유럽이나 미국 여행을 계획하더라도 체력이 따라주지 않고, 여행지에서의 감흥은 젊은 시절과는 다를 것이다.
그러니 인생의 엔딩을 미리 생각하고 내 삶의 중요도를 매겨 실행해 보는 것은 어떨까. 개인이 자신의 죽음을 세밀하게 디자인한다면 삶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쓸데없는 일이나 갈등에 쓸 시간과 에너지는 없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며 감사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기에도 아까운 시간이지 않은가.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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