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칼럼] 빚 권하는 사회, 이대로는 안 된다
자금의 융통, 즉 금융은 가계, 기업, 공공기관 등이 단기적 시야를 벗어나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실현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다른 좋은 것과 마찬가지로 금융도 지나치면 문제다.
지금 한국은 부채가 너무 많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2023년 말 한국의 GDP 대비 민간 부채비율은 222.7%로 OECD 38개 국가 가운데 네 번째로 높았다. 부채의 많고 적음은 역사적·문화적 차이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이 코로나 팬데믹 직전에 비해 부채가 가장 많이 증가한 국가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보다 민간부채비율이 높은 스위스, 스웨덴, 노르웨이는 4년 동안 부채가 거의 늘지 않았거나 감소했고, 미국도 3.3%포인트 감소했다. 반면 한국은 4년 동안 민간부채비율이 26.5%포인트 증가할 정도로,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빠르게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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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간부채 코로나 이전보다 급증
가계대출 증가 속도는 위험수위
한은과 정부는 문제해결 소극적
고통스러워도 부채 축소 나서야
」
단기간 내에 부채가 급격히 증가하면 소득이 이에 따르지 못해 빚을 갚지 못하거나 파산하여 궁극적으로 금융위기가 닥쳐올 수 있다. 특히 민간부채 중에서도 가계부채의 급증이 우려를 가중하고 있다. 한국은 지난 4년 동안 가계부채비율의 증가 폭도 OECD 국가 중 가장 컸다. 2024년 들어와서 가계부채 증가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2022년 감소했던 예금은행의 가계대출은 2023년 다시 37조원 증가했고, 올해 들어서는 7월 말까지 25.9조원 증가하여 그 대출잔액은 1120.8조원에 이르렀다.
가계부채 급증의 원인은 무엇인가? 가장 큰 책임은 한국은행과 정부의 정책에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은행의 섣부른 기준금리 동결이 가계대출이 급증한 근본 원인이다. 한국은행은 2023년 1월 기준금리를 인상한 후 미국 연준이 추가적으로 금리를 올렸음에도 더 이상 금리를 올리지 않았다.
정부는 어떠한가? 금융당국은 가계부채 관리를 올해 최우선 과제로 정하고 강화된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등을 내놓았으나, 정부의 다른 쪽에서는 이에 반하는 정책을 들고 나왔다. 저금리 상품으로의 대출 갈아타기 서비스와 파격적인 조건을 내건 주택 관련 정책금융공급이 그것이다. 더 나아가 금융당국은 행정지도를 통해 금리 인상의 부작용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은행의 대출금리 인상을 억제했다. 올 4월부터 매달 5조원씩 증가하고 있는 예금은행의 가계부채는 그 증가율을 명목 GDP 증가율 이내로 관리하겠다는 정부의 다짐을 공염불로 만들고 있다.
금리 인상의 목적은 대출수요를 감소시켜 과도한 부채 증가를 억제하고 일부 부실화된 부채를 정리하는 것이다. 한 해 벌어들인 소득으로 가계 빚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하여 발생하는, 금융 취약성과 저성장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한국은행은 금리를 인상하지 않음으로써 금융시스템 불안정을 수반할 수도 있는 가계부채의 빠른 증가를 방조한 모양새가 되었다.
한국은행의 금리동결은 주된 업무인 물가안정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2%에 달하는 사상 최대치의 한·미 간 역금리 구조는 2023년 상반기 환율급등의 원인이 되었다. 원유나 원자재 등 경제적 파급효과가 큰 상품의 수입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에서는 환율상승이 수입원자재가격 상승을 통해 국내 물가를 올리는 주요 요인이 되어 오지 않았는가?
과도한 빚은 가계 소비를 위축시키고, 더 나아가 기업의 생산을 감소시켜 경제성장률을 낮춘다. 더 우려해야 할 것은 지나친 가계부채가 국민의 삶 자체를 피폐하게 만들어, 결국에는 한국 사회의 성장잠재력을 낮출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정부가 금융불안정성을 차단하고 미래의 경제성장을 도모한다면, 일부 고통스러운 일이 발생하더라도 국민 다수가 가진 부채를 조속히 축소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금융위기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과잉 부채의 축소를 계속 미루며 부도 위험에 직면한 가계 및 자영업자를 구제하여 당장 발생하는 잡음을 없애는 데 주력해 왔다. 현재를 위해 미래가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현진건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1921)를 연상케 하는 ‘빚 권하는 사회’를 해결하지 않으면 가계의 고통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한국은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2023년 이후 한국은행의 통화금융정책은 국제금융시장의 정책 흐름과도 동떨어진 것이었고, 독립적이어야 할 중앙은행이 약속과는 달리 정부의 눈치를 보며 금융긴축의 강도를 높이지 않았다는 의심을 살만한 것이었다.
최근의 예상대로 9월에 미국 연준이 금리를 인하한다면, 이는 다시 한국은행의 책임감을 시험할 시금석이 될 것이다. 이미 가계부채가 상당히 조정된 미국과 달리, 한국은 과잉 부채가 해결되지 않아 금리가 인하된다면 그 부작용이 더욱 심화할 상황이다. 한국은행의 현명한 선택을 기대해 본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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