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식의 시시각각] 기자 취재원 엿보려는 나라
하루에 수백 번 누구와 통화·문자를 주고받는지 통신정보를 국가기관이 들여다보는 건 경찰의 노상 불심검문과 같은 통신검문이다. 이는 일정 정도라도 사적 대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 그것이 통신내역 전체(통신비밀보호법상 통신사실확인 자료)를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특정 누군가의 신원 등 통신이용자정보를 확인하는 것이어도 마찬가지다. 대상이 언론사 기자라면 그의 전체 또는 일부 취재원은 노출된다. 그런 나라에서 언론의 자유는 이상이 없을까.
그때도 그랬다. 2021년 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중앙일보 사회1팀 기자와 가족, 타 부 기자, 취재원 등 수십 명의 통신이용자정보를 무차별 조회한 사실이 드러나자 “적법한 수사”라고 강변했다. 그해 5월 이성윤 고검장의 공소장 내용 보도를 이유로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로 입건해 사회1팀 기자들과 통화·문자를 주고받은 이들의 이름·주민등록번호·주소·전화번호·아이디 등 통신이용자 정보를 통신사로부터 제공받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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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만에 무더기 통신조회 재연
정권 바뀌어도 언론자유 침해 논란
권력보호 위한 위헌적 검열 아닌가
」
사회1팀장이던 기자는 칼럼으로 “권력 부패를 뿌리 뽑으라고 설립한 공수처가 거꾸로 대통령의 대학 후배인 이 고검장의 특혜·비리 의혹을 보도한 언론사를 무차별 사찰한 건 ‘국기문란’”이라고 비판했다. “노상 불심검문과 달리 통신검문은 우리의 통신정보를 누가, 왜, 무슨 이유로 털었는지 모르는 데다 거부권조차 없다. 겹겹이 위헌이다”라고도 지적했다. 공수처는 올해 2월에야 “진상 파악이 어렵다”며 이 수사를 접었다.
2021년 3월 ‘이성윤 고검장 황제 조사’ 의혹 CCTV 영상을 보도한 TV조선 기자들과 가족들도 공수처의 통신조회를 당했다. 검찰 측에서 관련 첩보를 누설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고 내사한 것이다. 경향신문 법조팀 기자들을 포함해 다수 언론사 기자들도 영문도 모른 채 공수처 등의 통신조회를 당했다. 야당 대선후보이던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국민의힘 의원 89명도 고발사주 의혹 수사와 관련해 통신조회를 당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그해 상반기 공수처가 통신조회한 전화번호 개수는 135개였다. 그런데 하반기엔 무려 47배인 6330개로 급증한다. 법원의 허가(통신영장)를 받아 통신사실확인자료를 제공받은 건수도 상반기 21개→하반기 200개로 늘었다.
결국 헌법재판소가 2022년 7월 재판관 전원일치로 통신조회에 대해 “수사기관이 통신자료 취득 후 통지 절차를 두지 않아 적법절차 원칙에 위배된다”며 헌법불합치 판정을 내렸다. 이후 국회가 전기통신사업법을 개정해 올해 1월부턴 수사기관은 30일 이내 당사자에게 조회 사실을 통지하되, 최장 6개월까지 통지를 유예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3년 만에 또다시 무더기 통신조회 논란이 벌어졌다. 이번엔 검찰이 대선 당시 윤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 사건 수사를 위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포함한 민주당 의원·당직자 130여 명, 또 수백 명의 기자와 가족·지인의 통신정보를 조회했다. 검찰 역시 공수처처럼 “적법하고 정당한 수사 절차”라고 항변했다.
뭐에 좋다고 정권이 바뀌어도 똑같은 사찰 논란을 반복하는가. 2023년 한 해 수사기관은 전화번호 463만 개의 통신조회, 51만 개의 통신사실 확인자료 조회를 했다. 도·감청이 아닌 ‘합법’이라고 해도 광범위한 통신검문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나마 목적이 다중 대상의 보이스피싱·금융사기·마약 등 조직범죄 수사였다면 십분 이해했을 것이다. 언론 보도를 수사한다며 기자들의 통신정보에 무시로 접근하는 건 언론의 자유 침해다. 나아가 권력자나 정치 진영의 유불리로 언론 보도를 재단하고 압박하려는 시도는 위헌적 검열이다.
제임스 매디슨은 1789년 미국 수정헌법 초안으로 “표현의 자유는 박탈되거나 축소돼선 안 되며, 자유의 위대한 보루인 언론의 자유는 불가침이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1945년 8·15 광복의 소중한 의미도 빼앗긴 우리말과 우리글, 언론의 자유를 되찾은 것 아닌가.
정효식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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