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3가에 울린 총성... 대통령과 한편인 깡패들

김종성 2024. 8. 2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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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시대별곡] 깡패가 정계개편에 관여하던 시절

[김종성 기자]

 5.16 이후 서울 시내를 돌며 조리돌림을 당하는 정치 깡패 이정재
ⓒ 위키미디어 공용
이승만 집권기에는 정치의 세계와 깡패의 세계가 상호 융합돼 있었다. 외형상으로는 각각의 세계였지만, 실제로는 하나처럼 움직였다. 정치깡패의 경우에는 그랬다. 한국 역사에서 이승만 집권기에만 있었던 독특한 현상이다.

한 손으로는 이승만 정권과 제휴하고 한 손으로는 시장 상인들을 갈취하는 그 시절 깡패의 파워를 보여주는 것이 있다. 이들의 손아귀에 정치권 살생부까지 있었나 하는 탄식을 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이승만의 3선 개헌을 위한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1954.11.29)이 끝난 뒤인 1955년 1월 29일 저녁 서울 종로3가에서 울린 총성이 그 장면을 만들어냈다.

종로3가에 울린 총성

그날 오후 7시 30분경이었다. 처음에는 40분경으로 알려졌다가 나중에 10분 앞당겨졌다. 단성사에서 영화 관람을 끝낸 관객들이 몰려나왔다. 그 속에 동대문파 보스인 정치깡패 이정재의 부하가 있었다. 정경민보사 문화부장 직함을 가진 김동진이었다. 해방 이후에 월남한 뒤 극우단체 대한청년단에 몸담았다가 국군 장교로도 복무했다고 알려진 정치깡패였다.

1955년 1월 31일자 <조선일보> 2면 우상단에 따르면, 정경민보사 기자와 함께 영화를 보고 극장문을 나오는 김동진을 누군가 불렀다. 군중들 틈 속에서 튀어나온 남자였다. 이 남자는 김동진 쪽으로 다가오더니 권총을 들어 발사했다.

저격자는 김동진이 한국전쟁(6·25전쟁) 중 인민군에 붙들렸을 때 함께 탈출했다고 알려진 깡패 이석재였다. 이석재도 동대문파였다. 이정재와는 6촌이었다.

그해 1월 하순 단성사에서는 <네바다의 동굴>이라는 수입 영화가 상영됐다. 그달 29일자 <동아일보> 조간 4면의 '영화·연극' 코너에 의하면, 서부극인 이 영화는 사건 당일 단성사에서 상영됐다. 흔히 말하는 그런 동굴(洞窟)이 아니라 구리 채광지인 동굴(銅窟)을 무대로 하는 이 영화의 원제는 구리 협곡(Copper Canyon)이다. 이런 서부영화를 보고 나온 김동진의 눈앞에서 총질이 벌어졌던 것이다.

총알은 김동진의 다리에 중상을 입혔다. 김동진은 백병원으로 실려가고, 이석재는 현장에서 붙들려 종로경찰서로 끌려갔다. 단성사 앞 저격 사건 또는 단성사 앞 총격 사건은 이렇게 일어났다. 사건 이틀 뒤에 나온 위 기사에는 "권총을 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같은 동대문파 내부에서 벌어진 이 총질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얼른 이해되지 않았다.

정계 요인 암살 계획

외형상 정치깡패 간의 총질이었던 이 사건은 피해자 김동진이 입을 열면서 일파만파 확산됐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이 사건의 실체는 거의 내란 수준이었다. 2월 1일자 <조선일보> 2면 상단은 "시내 백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김동진씨는 이번 사건이 '40여 명에 달하는 정계 요인 암살계획'으로 인하여 발단된 것이라는 말을 하여 일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고 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사사오입 개헌이 추진될 때인 1954년 11월 6일 자유당 감찰부차장 이정재가 김동진을 불러 엄청난 계획을 공개했다. 위 기사는 "신익희씨·김태선씨를 비롯하여 여야당 요인 및 경찰관 등 도합 40명의 정계 요인을 암살하련다는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이정재는 살생부를 꺼내놓았다. 김동진은 그것이 도표 형식이었다고 증언했다. 2월 2일자 <경향신문> 2면 중간에 따르면, 1956년에 대통령으로 출마할 신익희, 1960년에 대통령으로 출마할 조병옥, 친일청산 기구인 국회 반민특위 부위원장을 지낸 김상돈의 이름이 그 도표에 있었다.

장택상·백두진·전진한 같은 거물급들의 이름도 있었다. 이승만의 지시로 백범 김구를 암살했다는 혐의를 받아 이승만에게 부담을 주는 안두희도 있었다. 김태선 서울시장과 이순용 외자관리청장 같은 이들도 있었다. 여야와 정·관계를 일거에 전복하는 계획이 담긴 살생부였던 셈이다. 이승만 추종자인 이정재에게서 나왔으니, 이승만을 돕는 친위 내란을 위한 살생부였던 셈이다.

김동진만 도표를 본 게 아니었다. 위 기사는 "김동진씨 외의 또 하나의 증인은 이(이창용=국민회 종로구 조직부장)씨인데 이씨도 11월 6일 부탁받았을 그 당시 이정재 씨가 자기에게도 소위 제3세력 도표를 보이고 동 계획을 수행하는 데 협력하라고 요청"했다고 증언했다.

'제3세력을 암살하라'는 지시를 받은 김동진은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몸담은 조직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너무나 어마어마하고 어처구니가 안 나서 이를 거절"했다고 위 기사는 알려준다.

그런 뒤 김동진은 서울시경찰국 사찰과에 이 일을 신고했다. 이것에 대한 보복으로 이정재가 6촌동생을 극장 앞에 보내 총을 쏘도록 했다는 게 김동진의 진술이다. 위 2월 1일자 <조선일보>는 "권총 사격을 받을 당시에도 이정재씨가 현장에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는 김동진의 진술을 실었다.

김동진의 폭로는 정국을 강타했다. 이승만 정권은 평소와 달리 신속히 이에 대처했다. 사건 발생 2일 만인 31일 이정재를 전격 구속하는 전광석화 같은 모습을 보였다. 2월 2일자 <동아일보> 3면 중간은 31일 오후에 구속영장을 받은 서울지검이 종로구 명륜동에 사는 이정재를 잡아들인 뒤 그날 밤 10시 반경 서대문형무소에 가뒀다고 보도했다.

사건을 담당한 서울지검 김윤도 검사는 이석재의 총격이 이정재의 교사에 의한 것이라는 유력한 단서를 확보했다. 이때가 2월 11일이다.

이정재가 아무 이유도 없이 부하 김동진을 죽이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이 수사 결과는 김동진이 말한 이정재의 범행 동기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었다. 그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은 깡패 두목이 주먹계 평정이 아닌 정·관계 평정을 추진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으므로, 이정재가 약 40명을 암살하려 했다는 의혹은 이정재 배후의 이승만 정권에 부담을 주는 일이었다.

꼬리자르기

이 상황에서, 드라마에 자주 묘사되는 장면이 나타났다. 2월 17일자 <조선일보> 2면 상단은 "단성사 앞 저격 사건이 이정재씨의 교사에 의한 것이라는 유력한 단서를 잡고, 곤란하여졌던 수사가 호전되어 크라이막스에 도달하였을 무렵" 어이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김윤도 검사가 수사 과정에서 목격자들을 고문했다는 항의가 제기되더니 그가 수사에서 배제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 상태에서 '혐의는 농후하지만 직접 증거가 없어 불기소한다'는 부자연스러운 이유로 이정재가 16일 석방됐다. 이정재의 지휘를 받은 이석재만 구속기소되는 것으로 사건은 정리됐다. 혐의가 농후하면 수사를 더 해야 하는데도 그런 결론이 내려졌다. 혐의가 없다고 공표하기가 곤란할 정도로 사건의 실체가 명백했기에 벌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 정권이 혐의가 농후한 이정재를 보호하고자 꼬리 자르기를 한 것은 자신들과 이정재가 한편임을 시인하는 꼴이 됐다. 일반 깡패는 그럴 리도 없겠지만, 만약 일반 깡패가 그런 혐의를 농후하게 받았다면, 국가권력의 입장에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1950년대 사람들에게 각인된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깡패 정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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