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와 중동,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박호진 기자]
20세기로의 회귀
연일 기록을 경신하는 열대야는 대한민국이 동남아시아나 중동지역에 위치하지 않나 하는 푸념이 나오게 한다. 전 세계가 올림픽에 정신을 뺏기는 동안에도 중동과 우크라이나에서는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우리가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전쟁도 아니고 처음 전쟁이 터졌을 때의 충격에서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우리의 관심에서 잠시 멀어져 있었다. 그러나, 올림픽도 끝나고 중동에서의 확전 가능성은 우리 경제에도 파장을 일으키면서 다시 우리의 관심사로 돌아오고 있다.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우리는 코로나에 시달리며 우리가 자연과 환경에 미친 악영향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고 있었다. 언론은 물론 서점에는 기후 위기와 환경 재난을 언급하는 책들이 무수히 발간 되었다. 그리고 학계와 언론은 세계는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시대가 나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코로나의 기세가 한풀 꺾일 무렵인 2022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2023년에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분쟁은 중동 전쟁의 재발을 우려하게 하고 있다.
결국 언론과 학자들이 코로나를 겪으면서 선언했던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코로나 이전 시대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니 20세기 냉전 시대의 재현 내지 20세기 초 냉전 이전 시대의 데자뷔로까지 보인다. 물론 현재의 국제 상황이 냉전 시대의 재현은 아니다. 냉전 시대의 대립에는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병행되어야 하는데, 이데올로기는 슬쩍 뒤로 빠지고 진영 논리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유주의의 수호를 외치지만, 레이건, 대처 시대처럼 자유주의를 전 세계에 전파할 의지는 이미 가지고 있지 않다. 그냥 미국과 그 연맹국의 이익을 지키겠다는 정도의 자유 진영 수호의 의지이다. 중국과 러시아도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사회주의를 전파하겠다는 의지보다는 자국 그리고 자국과 우호 관계가 있는 국가들을 지키겠다는 진영 논리 또는 서구 패권주의에 대항한다는 또 다른 패권 논리를 펼 뿐이다.
특이하게도 한반도만이 냉전 시대를 잘 재현하는 듯하다. 북한을 비난하고 자유대한민국의 우월성을 알리는 선전물을 풍선에 날려 보내고 북한은 무력 시위와 쓰레기 풍선으로 이에 답하고 있다. 사실 남북의 극한 대립도 속사정은 다르다. 북한은 적화통일을 포기한 듯하고 남한 정부를 비난하는 삐라 대신 선동 문구가 없는 쓰레기를 보낸다. 북한 체제의 우월성에 대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올해 광복절에 윤 대통령은 남한 체제의 우위를 자신하는 흡수통일론 전략을 국민에게 알렸다. 그러나 그에 대한 국민의 낮은 지지율을 고려하면 흡수통일의 실현 가능성보다는 국내 보수 진영에만 희망과 명분의 메시지를 준 것으로 보인다.
▲ 6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시내에서 현지 주민들이 러시아의 로켓 공격에 파괴된 차량을 살펴보고 있다. 이날 러시아의 로켓 공격으로 최소 8명의 주민이 부상했다. 2024.08.07 |
ⓒ 연합뉴스 |
물론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이 어느 시기에 발생했건 두 문명 간의 충돌이니 헌팅턴의 이론이 맞지 않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헌팅턴의 전제는 냉전 체제와 서구의 몰락 이후 도래하는 세계 각 지역 문명의 충돌이다. 즉, 서구의 보편주의가 무너지면서 세계의 문명들이 충돌한다는 것인데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은 서구의 보편주의가 쇠락하기는커녕 절정으로 치닫기 이전에 시작된 분쟁이다.
중동전쟁일까? 중서 전쟁일까?
<문명의 충돌>이라는 저서는 발간 당시에 각 민족 간의 분쟁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책이지만, 2024년에 재독해 보면 틀린 부분이 적잖이 눈에 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이론의 핵심 문제는 서구인들의 시각, 좀 더 정확히는 미국인의 시각으로 냉전 체제와 서구의 쇠퇴를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이른바 에드워드 사이드가 논했던 오리엔탈리즘이 그의 머릿속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문명 또는 문화의 충돌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지속해서 반복 되어왔다. 그리고 2024년 현재 시점에서 역으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가장 큰 문명의 충돌은 1990년대 이후가 아니라, 서구가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를 점령했을 때 일어났다.
그런데, 헌팅턴은 근대의 시발점이 되었던 이러한 충돌을 서구가 타격을 받았다기보다는 충돌로 막대한 득을 보았음으로 엄청난 충돌로 인식하지 않고 1990년대 동아시아 및 기타 문명 국가들이 성장세를 보이자, 이를 서구의 쇠퇴 그리고 문명의 충돌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의 주장이 서구를 헐뜯는 옥시덴탈리즘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극동아시아인인 필자로서는 오리엔탈리즘이나 옥시덴탈리즘이나 매한가지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일찍이 그의 저서 <오리엔탈리즘>(1978)으로 전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오늘날에도 국내외 학자들이 사이드를 인용하고 있지만, 서구적 시각의 한계를 지적한 사이드도 역시 그가 아랍인으로서 가지는 시야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사이드는 서구인들이 비서구인들의 문명을 오리엔탈리즘으로 폄하하고 있다는 지적으로 인문학, 사회과학 전 분야에서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문제는 사이드 자신도 아랍 문명, 인도 문명, 동아시아 문명, 그 밖의 모든 문명을 오리엔탈리즘으로 묶고 있다. 그러나, 극동아시아인은 물론, 인도인, 동남아시아인의 관점에서 보면, 아랍 문명은 동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쪽에 있다. 물론 아메리카 대륙에서 보면 서구 문명이나 아랍 문명은 동쪽에 있다.
근대가 오기 전 그러니까 조선시대 이전에 서쪽에서 외국인이 왔다면, 그가 아랍에서 왔든, 이스라엘에서 왔든, 인도에서 왔든, 네덜란드에서 왔든, 러시아에서 왔든, 그는 우리 민족의 눈에는 다 같은 색목인, 서역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중동문제라 하는데 우리의 지리적 위치에서 바라보면 아랍은 우리나라에서 중서(中西) 쪽에 있고 유럽은 극서(極西) 쪽에 위치한다. 역사와 반대로 우리가 서역을 식민지 경영했다면, 당연히 우리는 아랍인을 중서인, 유럽인을 극서인으로 불렀을지 모른다.
우리가 중동 분쟁,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전쟁을 이러한 '서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현 사태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첫째 이 두 분쟁은 인도를 제외한 '서역' 내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던 전쟁의 일환이다. 둘째, 서구는 자신들의 팽창기를 근대라고 칭하였는데,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은 한반도의 분단만큼이나 서구가 주축이었던 근대가 만들어낸 실책이었다. 셋째, 아랍과 이스라엘은 전 세계에서 서로 가장 가까운 인접 문명이라는 것이다. 헌팅턴이 지적하듯 둘 다 유일신과 성경과 예루살렘을 중시하고 그 외에도 많은 문화적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 8월 10일(현지시각) 이스라엘군의 가자시티 내 학교 공습으로 100여 명이 사망한 가운데 알마마다니 병원에서 한 어린 소녀가 사망자 중 자신의 가족이 포함된 것을 확인한 뒤 울음을 터트리고 있다. |
ⓒ AFP=연합뉴스 |
서구가 근대에 전 세계를 비폭력적으로 식민화했다고 보기에는 이를 반증하는 방대한 자료가 있고 1차, 2차 세계대전이 소박한 전쟁이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역설적으로 근대부터 세계 평화를 위협한 문명은 서구 문명과 그 인접 문명이었다. 이 "서역" 문명이 근대에 늘 반복 사용한 지극히 '근대적인' 전쟁 명분으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 국제 전쟁의 첫 출발을 끊은 것이다. 필자가 아무리 담대하게 편의를 봐주더라도 이 두 분쟁과 서구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대한민국도 북한과 극한 대립을 벌이고 있고 국내에서도 정치인들이 극한 대치를 하고 있다. 헌팅턴의 저서를 읽으면서 필자가 잠시 부끄러웠던 것은 문명 충돌 시대에는 같은 문명권 국가끼리 뭉친다는 대목에서였다. 그는 남한과 북한도 뭉친다고 보았다. 그야 한국과 북한이 인접 문명국가들이 아니라 단일 문명, 단일국가니까 뭉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본 것이다.
올해 서울은 열대야 최장 기간을 경신했다. 필자는 기후 위기를 해결할 대안을 찾는 학자이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보고 깨달은 것은 국제 분쟁이 해결되지 않는 한 국제적인 합의가 꼭 필요한 기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엔이 재정립되어야 하고 공정해야 실효성을 있는 국제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새삼 하지 않을 수 없다.
토인비는 1960년대에 세계 정부의 등장과 그에 따른 독재까지 걱정했다. 그러나, 1945년의 UN이나 2024년의 UN이나 무력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서구 문명의 논리, 또는 근대의 논리로 서구와 이웃 또는 서구와 그 주변 '유사(類似)' 문명 사이에 항구적인 평화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수정이 불가피한 20세기 근대 이데올로기 논리가 남북한에서 다시 제기되고 국내의 여야 정치가들이 이를 두고 싸우는 것은 헌팅턴이 예상한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과는 정반대이다.
사실, 타 문명권의 사람들끼리 서로 적대하기 쉽다는 헌팅턴의 전제는 절반의 진리다. 무슨 옛날 미국 반전 영화에서 시사한 것처럼 적은 우리 안에 있다. '나'의 원수는 적지 않은 경우에 '나'와 가장 가까운 이웃이거나 친족이거나 친구이다. 그래서, 남북이 죽기살기로 싸우며 서구와 아랍이 극한 대립을 하고 한때 독일과 프랑스가 죽기살기로 싸운 것이다. 달라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같아서 싸우기도 하는 것이다.
'서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이는 서구나 아랍 문명을 배척하자는 얘기도 아니고 헌팅턴이 우려했던 것처럼 무슨 동아시아주의나 민족 종교로 되돌아 가자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그들이 갖는 시각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이 사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너'가 아님으로써 오히려 '너'에게 도움을 주는 경우이다.
덧붙이는 글 | 한국법률경제신문에도 기고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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