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8.15킬로미터를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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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 기자]
"잘 봐. 이제부터 엄마랑 똑같은 옷 입은 사람들이 많이 보일 거야." 월드컵공원 주차장에 들어서면서 말했다. 남편이 차를 세우는 동안 차창 밖을 기웃거리던 아이들이 소리쳤다. "어? 진짜네! 저기도, 저기도..."
태극기와 '잘 될 거야, 대한민국!'이 인쇄된 검정 티셔츠를 입고 고딕체 '대한민국'이 직조된 양말을 신은 사람들은 집결지인 평화광장보다 바로 옆 월드컵 경기장 안에 더 많았다.
식당과 카페와 매점이 있고, 화장실도 많은 데다, 넓고 시원하기까지 한 실내는 대기장소로 딱이었다. 나의 첫 오프라인 마라톤 참가를 응원하기 위해 온 가족이 나서면서 '서울까지 왔으니 겸사겸사 소풍이라도...?' 했다가 차에서 나오자마자 내리쬐는 해 때문에 포기했던 우리도 기꺼이 한 무리가 되었다.
사전 행사는 오후 6시부터, 달리기는 7시에 시작인데, 그때가 4시.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쇼핑몰도 돌아보고, 차가운 음료를 하나씩 마시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선크림을 덧발랐는데도 시간이 남았다.
남녀노소 참가자 구경을 실컷 했는지 아이들은 "지금 몇 시야?",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돼?", "심심해. 게임해도 돼?" 질문이 잦아졌다. 그사이 소나기가 쏟아져서 밖에 나갈 수도 없었다. "너네, 다이소에서 뭐 사고 싶댔지?"
러닝크루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20대 남자 둘이 자외선 차단 패치를 붙이며 서로 웃기다고 낄낄거렸다. 기념품 티셔츠를 커플룩처럼 입은 연인들이 팔짱을 낀 채 환한 얼굴로 조잘대며 지나갔고, 똑같은 티셔츠를 남다르게 패션 소품처럼 소화한 젊은이들도 보였다.
부부 혹은 자녀가 함께 참가하는 가족들도 있었다. 나는 혼자 배 번호를 붙이고 기념품으로 받은 에너지바를 씹으며, 클레이를 주물럭대는 나의 세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걸까?
▲ 사전행사 중. 나는 중간보다 앞쪽에 있었으니 뒤로 더 와글와글. |
ⓒ 정유진 |
무리 사이를 가로지르는 줄이 몇 개 있었는데, 소형 태극기 받는 줄, 협찬사가 적힌 가판대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줄, 타투 스티커 붙이는 줄이었다. 경기장으로 대피하기 전에 태극기를 받고 사진 찍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타투 줄에 섰다.
하고 싶다는 사람은 막내뿐이었지만 마구 흥을 북돋아주는 해비타트 관계자 덕에 다 같이 했다. 그리고 해비타트 후원 약정까지(충동 약정이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이 단체를 진심 응원한다!).
문제는 타투 스티커 밖에 안 붙였는데, 벌써 남편과 아이들이 지쳤다는 것이었다. 찜통 더위에 사람들의 열기 그리고 꽝꽝 울리는 스피커 소리와 익숙지 않은 인파, 제각각의 이유로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했다.
일단 무대 뒤쪽으로 피했던 가족들은 금방 (차를 광장 옆에 바짝 댄 후) 차 안으로 들어갔단다. 나는 군중 속에 덩그라니 서서 헷갈렸다. 나는 지금 외로운가, 자유로운가?
낮에 81.5km를 달리고 온 션이 해비타트 대표에게 기부금을 전달했고, 소향이 무반주로 애국가를 부르고 사라졌다. 타이거 JK가 힙합 몇 곡을 부르고 들어간 다음, 션이 나와 가수 최은혜와 함께 30분쯤 무대에서 공연했다. 어떤 사실에 놀라고, 어떤 노래에 소름이 돋고, 어떤 외침에 환호하고, 어떤 말에 감동받으면서 우리(라고 해도 되겠지)는 같이 뿌듯해 하고 같이 소리 지르고 같이 방방 뛰고 같이 웃었다.
하지만 또 완전히 하나는 아니어서, 밀집도가 낮은 뒤쪽은 반응이 흐리기도 했고, 즐기는 자와 어색한 자 사이에 스펙트럼이 있었고, 무대에 몰입하는 사람들을 헤치며 출발 대기선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찬양이 울려 퍼지자 술렁이기도 했다.
나는 8.15 광복절에 8.15km 달리기를 하겠다고 한 자리에 모인 이 사람들이 실제로 얼마나 다양할까 궁금했다. 같은 옷을 입었어도 달리기 실력이나 경력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션이 독실한 기독교인인 것은 그가 이 대회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인 것만큼 주지의 사실인데, 공연 중 찬양 한 곡 넣은 것에 대해 사람들은 얼마나 다르게 받아들였을까.
그리고 광복절에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참가비 중 일부를 기부하는 방식으로) 좋은 일을 하고 싶어하지만, 독립운동과는 무관할 뿐 아니라 독립운동 정신과 배치되는 친일인사를 독립기념관장에 앉힌 일을 비롯 우리의 독립운동 역사를 지우려는 현 정부에 대해 비판하는 언사가 조금이라도 나왔다면, 그러니까 그런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지만, 만약 광복절 이 시국에 반골의 대명사 힙합 래퍼의 입에서 그런 메시지가 나왔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나는 어색하게 즐거워 하면서 그런 생각으로 붕 떠 있었다. "준비운동 안 하고 뛰는 거야?" 내 마음의 소리 같은 질문이 두어 번 들릴 때쯤 준비운동이 시작됐다. 짧고 굵게 끝났다. 이미 한 시간 동안 후텁지근한 날씨에 다닥다닥 붙어서 손을 흔들고 팔짝팔짝 뛰었더니 웜업은 될 대로 되어 있었고, 땀도 줄줄 났었다.
두 그룹으로 나누어 출발했다. 사회자는 (공식 기록을 측정하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기록을 내려고 하거나 50분 내로 뛸 수 있는 사람은 A그룹, 오늘 처음 마라톤에 참여하거나 아이들과 함께 뛰는 사람들은 B그룹에서 뛰라고 권유했다.
나는 양쪽 다 아니어서 (오프라인 마라톤은 처음이지만, 온라인 마라톤은 해봤으니까!) 편하게 B그룹 줄에 섰다가, 더욱 똘똘 뭉친 사람들 사이에 있자니 이러다 뛰기도 전에 지칠 것 같아 A그룹 꽁무니에 붙었다. 드디어 달린다는 생각에 설렜다.
▲ 다들 여기서 이러고 찍기에 따라서 해봤다. 기록이... 신기하게 딱 한 시간 걸렸다. |
ⓒ 정유진 |
처음부터 끝까지 부모님만 생각하며 달린 대회는 처음이었다. 완주해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피니시 라인에 다다르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부모님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오랜 시간 서 있는 게 힘들어 지쳤을 법도 한데,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나만 찾고 계셨다. 딸을 발견하곤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표정을 지으셨다.
- 안정은, <나는 오늘 모리셔스의 바닷가를 달린다> 78쪽.
마라톤 대회에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첫째(13세)는 굳이 가야 되냐고 시큰둥하게 물었고, 셋째(8세)는 자기도 같이 뛰면 안 되냐고 몇 번이나 해맑게 물었다. 둘째(11세)는 안 가고 싶다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한참 머뭇거리다 엄마가 질까 봐 그렇다고 답했다.
마라톤은 이기고 지는 게 아니라 꼴찌여도 완주하는 게 중요한 거라고 힘주어 말했더니, 그렇다면 엄마가 못 들어올까 봐 못 보겠다고 했다. 억지로 끌고 갈 일도 아니고 혼자 두고 갈 수도 없는데, 출발 예정 한 시간 전에 갑자기 정전이 됐다. "웬일이야. 우리 다 나가야 돼. 전기 안 들어오면 집에서 아무것도 못 해!"
8.15km는 이번이 두 번째였는데(경기 5일 전 처음으로 연습 삼아 달려봤다), 할 만했지만 예상보다 힘들었다. 너무 덥고 습하기도 했고(안경에 김이 서렸다), 이미 지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데, 남편과 아이들은 이 날씨에 밖에서, 차 안에서 무슨 고생인가... 내일이 개학인데 방학의 마지막 하루를... 외진 경기도에서 서울 한복판에 오가는 일이 고돼도 혼자 올걸, 내내 그런 생각으로 심란하기도 했다.
▲ 대체로 무난하고 예쁜 코스였는데, 쭉 비슷해서 아쉽기도 했다. 그래픽은 짚신벌레 같기도, 다리미 같기도... |
ⓒ 정유진 |
다섯이 모여 앉아, 땀을 닦고 물과 이온음료와 간식을 나눠 먹었다. 늘 그렇듯이 각자 (동시에) 이야기를 쏟아냈다. 반경 10m 안에선 우리가 이산가족인 줄 알았을 것이다. 남편이 힘들지 않았냐고 물어서, 벌써 꿈 같아진 달리기를 떠올리며 사실에 입각해 답했다.
"할 만했는데... 중간에 걷는 사람도 많았고, 속도가 달라서 앞이 가로막힐 때가 많았어. 조심스럽게 피해 달리는 게 좀 힘들었고, 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같은 모양의 산책로여서 은근히 지루하더라. 그래서 더 힘들게 느껴진 것 같고. 진짜 덥고 습했고... 어두웠고... 또 아까 한 시간 동안 서 있으면서 힘이 좀 빠졌었고..." 그 와중에 내 얘기는 듣고 있었는지 셋째가 해맑게 말했다. "엄마는 힘든 이유가 참 많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다음날 학교에 간다며 집을 나섰던 둘째가 다시 들어왔다. 깜빡했다며 완주 메달을 핸드폰으로 찍더니,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친구들한테 자랑하려고." 정말로 그날 방학 중 있었던 일에 대해 발표할 때 '엄마가 마라톤을 완주해서 자랑스러웠다'고 했다고.
달리기가 좋고 (풀코스가 아니어도, 오프라인이 아니어도) 마라톤 경기에 참가하는 게 재미있다. 그걸로도 충분한데, 나 혼자 즐겨도 넘치는데, 이건 또 무슨 일이람.
십여 년 동안 아이들의 얼굴을 보느라 어쩌다 거울 속의 낯선 나를 보면 놀랐다. 내 사진첩은 아이들의 것으로 가득찼고, 내 나이가 몇인가 할 때는 첫째의 나이에 서른을 더했다. 아이들을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여럿 중에서 찾아내고, 속으로 혹은 소리 내어 응원하고, 아이가 혹시나 마음 다칠까 걱정하면서 감격하고 뿌듯해하는 게 나의 역할이었다.
그게 당연했고, 영원히 그럴 줄 알았다. 거꾸로 나의 아이들에게서 관심과 응원과 축하를 한몸에, 그것도 격렬하게 받으니... 그야말로 묘했다. 뭐랄까, 가끔 떠올리게 될 것 같은, 그리고 아주 가끔은 다시 맛보고 싶은 그런 간질간질함이었다. 물론 만 하루도 가지 못하고 벌써 언급도 되지 않는 지난 일이 되었지만.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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