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혜의 시선] ‘8·15 통일 독트린’이 향하는 곳
나는 이산가족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순식간에 밀고 내려온 인민군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방직공장의 과장이었던 할아버지는 전쟁이 나도 공장에는 나가야 한다며 출근했다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국가유공자 가족이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교사로 일하다 6·25 전쟁이 터지자 우리 군 통역장교로 참전하셨다. 이북 출신이었던 외할아버지는 혹여 진짜 고향을 밝히면 군에서 받아주지 않을까 봐 고향까지 속여 입대했다고 했다.
■
「 ‘통일=광복 완성’ 공감해도
북한 호응 여건 조성 안 보여
‘진심’ 보일 후속조치 기대
」
기막히다면 기막힌 한 가족의 사연, 하지만 이런 사연 정도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게 진정한 한반도의 비극이다. 지난 15일 제79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분단 체제가 지속하는 한 우리의 광복은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데 대해 두 할아버지의 손녀로서 공감한 이유다.
경축사를 통해 윤 대통령이 발표한 ‘8·15 통일 독트린’에서 통일의 주체를 북한 정권이 아닌 북한 주민으로 규정한 것 역시 반가웠다. 북한이라는 존재 자체를 하나로 집단화할 경우 북한을 지나치게 적대시하거나 지나치게 동조하는 패착으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3대 통일 비전 ▶3개 통일 추진 전략 ▶7대 통일 추진 방안을 담은 ‘3-3-7’ 구조로 이뤄진 통일 독트린은 사실 틀린 말이 하나 없다. 그 안에서의 논리 구조도 상당히 탄탄하다.
그런데도 뭔가 답답하다. 아니, 공허하다. 이념적 당위성에 멱살 잡혀 끌려가는데, 끌려가는 그곳에 정말 통일이 있는 것인지 의심을 거둘 수 없는 기분이다.
“한반도 전체에 국민이 주인인 자유 민주 통일 국가가 만들어지는 그 날, 비로소 완전한 광복이 실현되는 것”이라는 윤 대통령의 선언도 그렇다. 더 없이 맞는 말, 정의로운 말이지만, 이는 곧 지금의 김정은 정권은 윤 대통령이 그리는 통일 국가에 설 자리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북한 입장에선 자신들의 체제 자체를 통째로 흔든다고 인식할 여지가 크다.
물론 헌법과 대법원 판례상 북한 정권은 반국가단체이고, 북한 주민은 대한민국 국민이다. 헌법 4조가 규정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을 위해 북한 정권은 배척하고 북한 주민을 통일의 주체로 포용한다는 논리는 그래서 성립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먼저 민족과 통일 개념을 부정하는 헌법 개정을 선언하자 우리 헌법 정신을 내세워 ‘1민족 1국가’로 맞받아친 것 역시 논리적 응수로 볼 수 있다.
안타까운 건 북한은 법과 논리로만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의 김정은 정권이 어떤 방식으로든 말로를 맞아야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무력 통일을 추구하는 게 아닌 이상 모든 시작점은 대화와 협상이 돼야 한다. ‘악마와 춤’도 필요한 지점이 분명 있다는 뜻이다.
윤 대통령이 남북 당국 간 실무 차원의 대화 협의체 설치를 제안한 것도 이런 고민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어떤 의제든 다룰 수 있는 대화 채널 구축 제안은 의미가 크다. 다만 북한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 조성을 위한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환심 사기에만 급급하다 ‘삶은 소대가리’라는 비웃음을 산 전임자의 대북 정책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번 통일 독트린에는 가장 중요한 진정성에 자꾸 의문부호가 따라붙는다.
북한이 완전히 대화의 문을 닫은 상황에서 ‘우리가 먼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는 통일 독트린의 방향 설정도 설득력이 있다. 동시에 ‘우리’의 분모를 확장하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 최대한 다양한 진영을 포괄하는 ‘우리’일 때 통일 독트린도 힘을 받을 수 있다. 30년 전 나온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지금도 우리 정부의 공식 통일 방안으로 유지되는 건 초당적 지지에 기반한 측면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초유의 두 쪽 난 광복절 경축식에서 통일 독트린이 나온 건 안타까운 일이다. 또 통일을 중심에 둔 경축사의 상당 부분을 “허위 선동, 가짜 뉴스, 사이비 논리” 등 내부 저격에 할애한 것 역시 필요한 지적이라 해도 어색하다.
다시 말하지만, 이번 통일 독트린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특히 북한 인권 상황 개선을 중심에 둔 다양한 액션 플랜은 기대가 크다. 북한 인권 문제는 완전히 눈감거나 반대로 대북 압박의 수단으로만 소진했던 이전 정부의 과오를 넘어설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통일 준비란 건 일방적으로만 할 수는 없다. ‘진심’을 보여줄 수 있는 후속 조치가 이어지길 기대한다.
유지혜 외교안보부장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박헌영, 이 가혹한 호적등본…생모는 첩, 직업엔 "주막업" | 중앙일보
- 최민식 "파묘가 반일 영화? 그렇게 치면 명량도 반일 아니냐" | 중앙일보
- "기자양반, 잔머리 굴리지 마"…'앱도사'에 직장운 물었더니 | 중앙일보
- 백지영도 놀란 전기세 폭탄 "8월초에 71만원? 에어컨 다 꺼라" | 중앙일보
- 박수홍 "30㎏ 빠지고 영양실조…남자 역할 못해 시험관 시술" | 중앙일보
- 병원서 성폭행 후 살해된 여성 수련의…"12년전 악몽 떠올라" 인도 발칵 | 중앙일보
- 연차 이틀 내면 9일 쉰다…추석 국내여행지 1위 제주 아닌 이곳 | 중앙일보
- 전청조 자백 받아냈다…게임광 여검사의 '과자 6봉지' | 중앙일보
- 순찰차에 35시간 갇혀있다 숨진 40대…경찰 "안 쓰던 차" | 중앙일보
- 출근 전 외국인 불륜남과 호텔 밀회 들켰다…일본 의원 결국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