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수 전 장관과 어른들 [김선걸 칼럼]
어른들이 있던 시대가 있었다.
경륜과 통찰과 권위가 있었다. 종교계에도, 정치권에도, 문화계에도, 아니 그저 작은 촌동네에도 어른이 있었다. 중심을 잡고 가르침을 줬다.
한때 미국 언론에 ‘어른들의 축’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 어린아이처럼 충동적이고 예측 불허인 트럼프 대통령 시절, 균형추 역할을 했던 ‘어른’들을 부르는 말이었다. 옆에 이들이 보여서 전 세계가 안정감을 느꼈다. 매티스 국방장관,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 맥매스터 전 안보보좌관 등이었다. 북한과의 엉터리 핵거래, 주한미군 철수 등을 막아낸 역할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주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 회고록인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도전실록’을 펴냈다. 1970년 입직 후 1977년 부가가치세 도입(책임자), 1982년 금융실명제 추진(과장), 1997년 외환위기(차관),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장관) 등 한국 경제의 분기점마다 태풍의 눈에 서 있던 기록이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오늘에 이르는 데는 강 전 장관이나 그 후임인 윤증현 전 장관 같은 ‘어른들’이 있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한 강골들이다.
강 전 장관 책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소규모 개방 경제가 외환위기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경제의 펀더멘털에 상응하는 환율 관리라는 것이 1997년 환란의 교훈이다. 과거 재경부 장관들이 환율을 시장에 맡긴다고 한 것은 책임 포기다. IMF와 외국의 절상 압력과 보복 조치를 무서워한 것은 주권의 포기이고 굴복이다(434p).”
지금까지도 과잉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강 장관은 이 같은 강경 ‘환율주권론’으로 2008년 금융위기 때 ‘선제적이며 결정적이며 충분한 대응’에 나섰다. 물가 급등 등으로 인한 비난과 욕설을 온몸으로 떠안은 선택이었다. 결과적으로 2009년 선진국 모두가 역성장을 할 때 한국만 성장했고, ‘서울의 관료들에게 경의를 표함(Hats off to officials in Seoul)’이라는 블룸버그의 기사가 나왔으며, IMF가 교과서적인 위기 대응 사례로 꼽았다.
그는 1985년 뉴욕 재무관 시절 일본을 나락으로 보낸 ‘플라자합의’를 지켜봤다. 1997년 차관 땐 외환위기를 대응하며 쓰라린 교훈을 얻었다. 못 본 체 적당하게 대응하는 척할 순 없었을 것이다. 사탕발림보다 책임감이 앞서는 게 어른이다.
책의 메시지는 강렬하지만 일관되다. “동서고금 인류사에 없었던 정치 폭력인 종부세를 폐지해야” “지금 천성산 습지에는 도롱뇽이 더 많아졌다는데 엄청난 국고 낭비를 초래한 도롱뇽 스님은 어디 가셨나.”
한 챕터는 ‘관료의 길’로 할애돼 있다. “관료는 국가의 최후 보루다. 대중에 영합하면 미래가 없다.” “나는 공직 생활에서 옳은 것은 언제 어디서나 옳고, 해야 할 일은 아무리 어렵고 누가 뭐래도 했다(587p).”
나라를 위한 결단이었지만 알아주는 사람은 적고 뭇매를 맞던 시절, 그는 매일 새벽 교회에 나가 ‘언젠가 나의 공의를 정오의 빛과 같이 하시리라’는 성경을 되뇌었다 했다.
이 책 서문에는 최중경 당시 기획재정부 차관, 신제윤 차관보, 임종용 경제정책국장, 최종구 국제금융국장, 그리고 최상목 정책보좌관 등에게 사의를 표하는 대목도 있다. 다음 세대가 현장에서 경험을 쌓고 어른으로 성장한 셈이다.
이젠 어른이 보이지 않는 시대다.
금투세, 종부세 같은 근본 없는 세금을 없애는데도, 혹은 국민 목숨이 달린 국방도 눈치를 본다. 어른이 없는 사회에선 결국 다음 세대가 손해를 본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3호 (2024.08.21~2024.08.2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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