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부터 '크로스'까지... 제작사의 뚝심이 반갑다
[김성호 기자]
무엇을 보고 영화를 선택하는가는 영화팬 사이의 오랜 관심이다. 포스터와 예고편, 각종 커뮤니티에서 발견하는 소개글,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이야기로부터 영화를 정하는 이가 많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대중적 방식일 뿐이다. 영화를 제대로 즐기는 이 사이에서 권장되는 일은 아니란 뜻이다. 마케팅이란 어디까지나 더 많은 이를 현혹하려는 제작진의 접근법이지 관객의 입장에서 현명한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르와 소재를 보고 영화를 고르는 건 좋은 선택지일 수 있다. 관객마다 나름의 취향이 있게 마련이고, 그와 같은 취향을 체계화한 것이 곧 장르며 영화의 소재가 되는 것이다. 시대물을 좋아하는 이들, 그 가운데서도 중세며 근대 작품을 찾아보는 이들에게 이와 같은 배경설정은 놓칠 수 없는 요소가 된다. 또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나 말랑말랑해지는 로맨틱코미디, 일상의 모든 고민을 가볍게 느끼도록 하는 재난영화를 찾는 건 얼마나 명확한 선택인가.
▲ 크로스 포스터 |
ⓒ 넷플릭스 |
그렇다면 영화사는 어떨까. 영화사가 영화를 선택하는 유효한 기준점이 되어줄 수 있을까?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많은 경우 아니라고 답하겠다. 수익을 추구하는 게 주요한 목적인 영화사 입장에서 내놓는 작품 사이 일관된 기준을 갖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서다. 어느 날은 이런 영화를, 저런 날은 저런 영화를 내놓는 게 보통의 영화사다. 질은 물론이고 영화사가 특별한 색깔이라도 갖는 경우는 그리 많지가 않다.
그러나 언제나 예외가 있다. 사나이픽처스가 바로 그런 경우다. 오늘 '씨네만세'에서 소개할 영화 <크로스>는 2012년 설립된 사나이픽처스의 14번째 영화다. 특정 장르를 즐기는 영화팬 사이에선 이 영화사의 이름이 익숙할 수도 있겠다. 그건 이 영화사가 줄곧 일관된 스타일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첫 작품은 2013년 개봉한 박훈정의 <신세계>였다. 이듬해엔 <남자가 사랑할 때>, 2015년엔 <무뢰한>과 <대호>를 내놨다. 2016년엔 <검사외전>과 <아수라>를, 2017년 <보안관>, 2018년 <공작>을 제작했다. 2022년 <헌트>, 지난해 <화란>을 거쳐, 올해엔 <리볼버>와 <크로스>가 관객과 만났다. 이들 작품군을 살펴보면 사나이픽처스의 성향이 확실하게 그려진다. 남성 관객을 타깃으로 한 상업영화, 특히 액션과 정치, 누아르 등을 대중적으로 버무리는 데 일가견이 있다.
▲ 크로스 스틸컷 |
ⓒ 넷플릭스 |
넷플릭스에서 선보이게 된 <크로스>도 그와 같은 경우다. 배우 이선균 사망 뒤 개봉이 반년 넘게 연기된 이 영화는 전혜진 외에도 황정민, 염정아, 정만식, 김병옥 등 눈에 익은 배우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한다. 제작부 경력만 있는 신인감독 이명훈에겐 결코 흔치 기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각자 확고한 이미지와 팬층을 가진 유명 배우가 한꺼번에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영화는 갖지 못할 귀한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간명하다. 미선(염정아 분)은 강력범죄수사대의 자타공인 에이스 형사다. 온갖 형사액션물의 마초적 형사 캐릭터를 합쳐놓은 듯한 그녀는 선후배 사이에서 누구도 함부로 건들 수 없는 실세 중 실세다. 아무리 험한 사건도 몸으로 부딪치며 해결해내는 미선의 배짱 앞에서 팀원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보낼 밖에 없다.
▲ 크로스 스틸컷 |
ⓒ 넷플릭스 |
그러나 강무에겐 비밀이 하나 있다. 미선에 알리지 않은 제 과거다. 대테러부대 출신으로 각종 국가보안 사건에서 중책을 맡아 수행해왔던 비밀요원이었던 것이다. 러시아에서 밀반출되는 미사일을 상부에 보고 않고 조사하다 동료를 잃은 사건이 문제가 돼 옷을 벗은 게 벌써 한참 된 일이다. 과거는 잊었다 생각하고 미선의 남편으로 집안일을 돌봐온 그에게 어느날 반갑지만은 않은 소식이 당도한다.
<크로스>는 전직 특수부대 요원 남편과 베테랑 형사 아내의 좌충우돌 액션영화다. 모종의 비밀이 드러나고 반전이 극을 전환하는 가운데 남편과 아내의 믿음이 한층 두터워지는 과정을 그린다. 조국을 위기에 빠뜨릴 음모를 부부는 그저 지나칠 수 없다. 남다른 애국심과 책임감으로 휘말린 사건을 어찌어찌 해결해나가는 과정이 나름의 재미를 던진다. 전직 요원과 형사, 부부의 비밀이며 음모와 위기, 해소에 이르는 설정과 과정이 반사적 반응을 일으킬 만큼 익숙하다.
▲ 크로스 스틸컷 |
ⓒ 넷플릭스 |
가장 아쉬운 건 배우의 활용이다. 황정민과 염정아, 전혜진, 정만식, 김병옥과 같은 출연진은 영화의 강점이 될 수 있는 요소였다. 그러나 영화가 그를 활용하는 방식이 너무나 안이한 나머지 도리어 독으로 작용한다. 한국 영화팬 치고 이들을 영화에서 수차례 본 이가 많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이 맡아온 캐릭터에 관객이 이미 익숙하다는 뜻이다. 영화는 출연한 배우 대부분을 가장 익숙한 배역으로 활용하는 악수를 둔다. 황정민은 서글서글하고 의로운 인물이고, 염정아는 안 어울리게 투박하지만 진심이 있는 형사다. 정만식은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감초 역할을 수행하고, 김병옥은 기괴한 인상을 남기는 악당이다. 전혜진 또한 그녀가 자주 맡아온 익숙한 캐릭터,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한다.
출연한 배우 모두를 가장 흔한 방식으로 활용하다 보니 영화 전체가 진부하단 인상을 준다. 사연이 있는 전직 요원과 일에 중독된 형사, 돈을 노린 배신과 그를 징벌하고 선을 이루는 이야기 또한 식상하다 느낄 만큼 반복돼온 것이다. <크로스>는 제목에서부터 남녀의 익숙한 성역할을 뒤집는 정도의 선택을 자랑처럼 내세우지만, 1980년 작 <글로리아>가 나온 지 반세기 가까이 지났다는 점을 고려했어야 했다. 권총을 능숙하게 다루며 남성 악당을 때려잡는 여자 캐릭터는 이미 익숙하다. 단순한 설정의 교환을 넘어 디테일을 매만져야 했다는 뜻이다. 간판과 메뉴만 바꿔단다고 맛없는 집이 맛집이 되지는 않는 것이니.
그럼에도 사나이픽처스가 제 색깔 있는 작품을 거듭 찍어내고 있단 점은 눈여겨 볼만 하다.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가볍게 대중을 지향하는 남성향 영화를 만들어내는 이들의 작품세계가 어느덧 관객에게 제 색채를 각인해가고 있다. 연출할 기회를 부여받은 신인 감독들이 명배우들과 함께 작업한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이와 같은 시도가 마침내 한국 영화계를 더욱 활기있게 하리라고, 나는 기대하고 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룸살롱 다녀온 택시 손님의 말... 우리 가족은 분노했다
- [영상] "이런 독립기념관은 처음"... '김형석 아웃' 현수막 물결
- 영국서 잘 팔리는 '한국식 치킨볼', 뭔지 알면 놀랄 겁니다
- "방학 동안 학원 가지 마" 충동적인 결정, 그 결과는?
- 식자재 마트 계산원이 가장 듣고 싶은 말
- '성소수자 축복' 이동환 목사, 징계 무효 '각하', "혐오도 권리인가"
- 교토국제고교, 역전승으로 고시엔 결승 진출... 우승이 코앞에
- [오마이포토2024] 조국, 이재명에 난 대신 선인장 선물한 이유
- '대화' '합의' 30차례 강조한 국회의장 "여야회담, 채상병 특검부터"
- [오마이포토2024] 현직 국회의장, 민주노총 창립 이후 첫 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