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소복 입고 백악관 앞 데모... 미국 여론이 흔들렸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얼마 전 광복절 기념식이 반쪽으로 치러졌다. 겉으로는 광복회가 별도의 기념식을 개최하면서 일어난 일이지만, 정부 기념식을 거북해하거나 지켜보기 힘들다는 국민적 정서가 밑바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암울한 상황을 워싱턴 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정대위) 이사장인 이정실 조지워싱턴대학 교수는 '새드(sad, 슬픈·안타까운)한 국면'으로 지칭했다. 이 교수는 지난 18일 오후 경기도 하남시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지금은 다시 우리가 새드한 국면에 접어들었잖아요"라며 태평양 건너에서 바라보는 역사문제를 다루는 한국 정부에 대한 소감을 표시했다.
2015년부터 워싱턴 정대위와 미국 위안부운동에 헌신해 온 그는 미국 위안부운동의 역사를 정리한 공저작인 <위안부(Comfort Women)>를 2020년에 펴냈다. 재미교포들과 미국 시민들이 주도한 이 운동을 정리하고자 약 250명을 취재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의 한국은 '새드'하게 볼지라도 장기적으로는 긍정적으로 전망하고 있는 듯했다.
한일관계에서 한국이 아닌 일본을 편드는 미국에서 위안부운동이 성공을 거두었다. 그 비결을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국인들이 이 문제뿐 아니라 전반적인 역사운동에서도 결실을 거둘 날이 멀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 인터뷰를 끝낸 직후의 이정실 교수 |
ⓒ 김종성 |
이 교수는 그런 요인 외에 미국 내에서 작용한 두 개의 요인을 상세히 언급했다. 그는 "92년에 LA폭동(1992.4.29)이 있었잖아요"라며 흑인들이 일으킨 이 사건이 위안부 운동에 끼친 영향을 이렇게 설명했다.
"LA폭동 전까지 한국 사람들이 뭉치지를 않았어요. 옛날에 안창호 선생 같은 분들이 한국인들을 결집한 사례들은 있었지만, 전국적 규모의 한인회는 없었죠.
그런데 폭동이 터지고 보니까 한국 사람들이 그냥 개·돼지 취급받고 죽거나 말거나 방치되는 거예요. (미국 경찰이) 한인촌 뒤로 빠져나가 베벌리힐스와 할리우드만 지키니까 완전히 화가 나잖아요. 한인 청년들이 스스로 총을 갖고 가족을 지켰어야만 했다고요. 그러자 '아, 우리가 이렇게 마이너리티이고, 우리가 인간 취급을 못 받는구나, 돈만 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정치력을 쌓아야 하겠다'고 각성을 하게 되죠."
1992년 5월 6일 자 <동아일보> 기사 '미국 속의 코리안 (1): 단결력 약한 130만 동포'도 똑같은 말을 했다. 이 기사는 "미국 흑인폭동의 최대 피해집단이 된 한인 사회는 지금 재기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라며 "130만 재미한인교포들은 새삼 힘없는 소수민족의 설움을 느끼면서 미국 내에서의 위상과 좌표를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재미교포들이 자신들의 위상과 좌표를 고민하던 바로 그 시기에 한국에서 위안부 운동이 건너갔고, 이는 교포들이 위안부 문제에 공감을 느끼고 적극 동참하는 계기가 됐다고 이 교수는 설명한다.
▲ 일제청산연구소 월례포럼에서 발표하는 이정실 교수. |
ⓒ 일제청산연구소 |
그는 미국 경찰이 폭동의 위험에 내몰린 한국인들을 '내깔기는' 것을 보고 재미교포들이 정신이 번쩍 들게 됐다고 말한다. 내 목소리는 내가 내야겠다고 각성하는 분위기가 고조됐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의 미국 정대위 회원들이 하얀 소복을 입고 거리 시위에 나선 사진을 파워포인트로 보여주면서 "저희 정대위는 분명히 아줌마 집단이었어요. 아줌마들이 중축이 된 집단이었어요"라고 한 뒤 이런 말을 했다.
"아줌마들 굉장히 무섭죠? 그래서 더 무서워하라고 소복 같이 하얀 옷을 입고 백악관 앞에서, 법무부 앞에서, 국회 앞에서 데모를 엄청 해댔습니다."
재미교포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위안부 운동에 나선 것, 이것이 미국 위안부 운동의 성공을 추동하는 힘이 됐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이 운동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재미교포와 위안부운동의 연결이 보다 쉬워지도록 기능한 것이 LA폭동이라면, 미국인들과 위안부운동의 연결이 좀 더 용이해지도록 기능하는 것도 있었다. 위 인터뷰에서 이 교수는 1980년대 이후로 미국에서 인디언과 흑인의 인권에 대한 반성적 사고가 확산되다가 1990년대 초반에 위안부 운동이 도입된 것이 그런 기능을 했다고 말한다.
"미국이라고 해서 인권이나 페미니즘이 뭐 그리 대단했겠어요? 자기네도 인디언 짓밟고 흑인을 샀던 사람들인데. 그런데 그것(인권이나 페미니즘)에 대한 자각이 1990년이나 조금 이전에 생기기 시작한 거죠. 정부에서도 관련 부서를 만들고 사법부에서도 조사를 시키고."
이런 움직임은 1980년 이래 12년간의 공화당 지배가 끝나가면서 더 강해졌고, 때마침 한국에서 위안부운동이 도입되고 때마침 재미한국인들이 각성하는 상황과 접목돼 파괴력을 발휘했다고 이 교수는 지적한다. 바로 그 상황에서 황금주 할머니가 199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위안부 피해를 증언하고 이것이 폭스TV를 타고 전파되면서 미국 여론이 흔들렸다고 이 교수는 언급한다.
그는 그렇게 형성된 흐름이 '위안부운동판 블랙리스트'의 작성으로 이어진 상황을 거론한다. 미 법무부가 '워치 리스트'로 불리는 감시 대상자 목록을 만들어 위안부 가해자들의 입국을 금지시킨 이 일을 두고, 1996년 12월 5일 자 <한겨레> 톱기사는 "미국 법무부는 2차 대전 때 일본군대 위안부와 생체실험 등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지른 일본인 전범 가운데 우선 16명을 미 정부의 '감시대상 인물'로 정하고 이들의 입국을 금지하는 조처를 취했다"라고 보도했다.
위안부 운동이 미국에 전파된 지 4년 만에 위 조치가 나왔다. 미국인들이 위안부 문제에 얼마나 빨리, 얼마나 강력하게 공감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인터뷰에서 이 교수는 그런 기운이 지금도 미국에서 타오르고 있다며, 미국인들은 이 문제를 한번 접하게 되면 깊이 빠지는 경향이 있다고 전한다. 이어 재미교포들이 이 위안부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받아들이듯이, 미국인들도 이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도 위안부 문제는 이미 한국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에 그는 방점을 찍는다.
지금 한국에서 전개되는 여타의 역사문제들도 위안부 문제처럼 될 가능성이 있다. 강제징용이나 강제징병도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한 인류 보편의 인권 문제다. 한국의 독립운동 역시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세계 약소민족의 한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위안부 문제에 담긴 인류 보편성이 이 운동의 세계화를 추동했다는 이 교수의 설명을 듣다 보면, 징용·징병과 독립운동 등도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전망을 갖게 된다. 한국 정부와 일본 내각이 단결한다 해도, 이 문제가 세계 보편의 문제가 되면 쉽사리 막아낼 수 없다. 그런 점에서도 한국 역사운동의 전망은 밝다고 전망할 수 있다.
11월 미국 대선이 한국 역사문제에 끼칠 영향에 대한 의견도 물어봤다. 그는 미국의 3대 마이너리티인 흑인, 아시아인(인도 혈통), 라틴계의 혈통을 모두 가진 데다가, 여성인 카멀라 해리스가 당선되면 아무래도 미국 위안부 운동에 더 나은 환경이 조성되리라는 기대감을 표시했다.
이 교수는 1996년에 미국 유학을 시작했다. 그는 28년 전과 비교할 때 한국 청년들이 훨씬 친절해졌고 사람들도 여유가 있어 보인다고 평했다. 지금 한국인의 삶은 팍팍하지만, 그가 유학을 떠날 때와 비교하면 크게 달라졌다는 이야기다. 이 교수는 사람들의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문제도 잘 풀리리라 기대된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