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동물보호법’은 있는데 ‘태아보호법’이 없다

2024. 8. 19. 00:3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주영 대한변협 법제연구원장

'낙태'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입법 유예기간 훌쩍 넘어서

동물 학대 엄하게 처벌하고
'동물권' 인정 주장까지 등장

정작 태아의 생명과 건강권
국회 입법부작위로 위협받아

‘이 법은 동물의 생명보호, 안전 보장 및 복지 증진을 꾀하고 건전하고 책임 있는 사육문화를 조성함으로써 생명 존중의 국민 정서를 기르고 사람과 동물의 조화로운 공존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1991년부터 시행된 ‘동물보호법’ 1조의 문구다. 동물보호법에 의해 보호받는 동물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신경체계가 발달한 척추동물로 포유류, 조류, 파충류, 양서류, 어류를 모두 포함한다. 이 법에 따르면 동물 소유자나 보호자는 적합한 사료와 물을 공급하고, 운동·휴식 및 수면이 보장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동물이 질병에 걸리거나 부상당한 경우 신속하게 치료하거나 필요한 조치를 하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다. 또한 정당한 사유 없이 동물을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잔인한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게 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정당한 사유 없이 고통을 주거나 상해를 입히는 경우에도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돼 있다. 처벌 대상이 되는 동물학대의 범위가 넓어지고 법정형이 높아지는 등 동물보호법은 점점 더 강화되는 중이다. 심지어 동물에게도 인권에 준하는 ‘동물권’을 인정해야 한다거나 민법상 권리의무의 주체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는 동물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는 법은 있지만 태아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는 법은 없다. 얼마 전 한 여성이 임신 36주차에 낙태 수술을 받고 그 과정을 담은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려 충격을 줬다. 영상이 조작된 게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으나 수사 과정에서 사실로 드러났으며 경찰은 영상을 게시한 유튜버와 수술한 병원장을 살인죄 피의자로 입건한 상태다. 하지만 실제 처벌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36주차라 해도 태아 상태로는 ‘사람’이 아니기에 생명과 건강에 대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태아를 출산한 후 일부러 죽게 했다면 살인죄가 성립되겠지만 태아 상태에서 죽음에 이르게 했다면 처벌이 불가능하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형법의 낙태 처벌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유예기간으로 정한 2020년 말을 훌쩍 넘어선 지금까지 대체 입법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현행법에 따르면 임신부 동의 없이 제3자가 낙태를 한 경우만 처벌할 수 있고, 임신부가 동의한 이상 36주차 태아라고 하더라도 낙태는 범죄가 안 된다. 실제로 임신 36주차 산모에게 낙태 수술을 집도한 병원장은 산모로부터 꺼내는 시점에 태아는 죽은 상태였다고 변명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병원은 주로 낙태 수술을 전문적으로 해왔고 30주 이상 낙태 수술비로 800만원에서 1000만원을 받아왔다는데, 낙태에 대한 법 규범이 없는 지금과 같은 상태가 장기화되면 영아 살인과 다름없는 낙태 수술이 더욱 성행할 것이 자명하다.

미국, 독일 등 여러 선진국에서는 태아의 생명권과 임신부의 자기결정권의 충돌을 직시하고 이러한 갈등 상황을 조화롭게 해결하기 위한 법 규범을 마련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임신 3개월까지는 태아를 생명으로 보지 않아도 무방하고, 6개월이 지난 이후에야 태아를 보호하기 위한 낙태 규제가 가능하다고 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이 연방대법원에 의해 뒤집힌 뒤 각 주에서 태아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법안이 제정되는 추세다. 독일에서는 임신 12주 이상의 낙태를 원칙적으로 처벌하고 있으며 임신 12주 이내의 낙태도 태아가 독립된 생명권의 주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시키고, ‘태아의 생명권’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하는 구체적인 상담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처벌받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헌법재판소가 개정 시한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낙태죄 폐지로 인한 법의 공백 상태를 메울 태아보호법이 입안조차 못 된 실정이다.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없는 태아의 생명과 건강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지금은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입법부작위 상태라고 평가할 수 있다. 동물보호법은 입법 목적 중 하나로 ‘생명 존중의 국민 정서 함양’을 들고 있다. 그러나 36주의 태아조차 보호하지 못하는 현행 법체계에서 생명 존중의 국민 정서가 길러질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 22대 국회는 최우선의 민생법안으로 ‘태아보호법’ 제정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김주영 대한변협 법제연구원장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