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호의 시시각각] 사장님, 마이크 좀 잡으시죠
한국의 최고경영자(CEO)는 마이크 잡는 데 인색하다. 기업 실적을 발표하는 콘퍼런스콜이나 투자설명회(IR)에 직접 나서는 경우가 많지 않다. 유명한 큰 회사일수록 더 그렇다. 지난주 중앙일보가 외국과 우리 기업의 사례를 대비해 보도했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애플의 팀 쿡,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 등 시가총액이 수천조원인 미국 기업의 CEO는 분기 실적 발표 때 등장해 주주 질문에 답한다. 기업의 자체 실적 전망치는 물론, 핵심 사안에 대한 CEO의 생각도 알 수 있다. 그러니 뉴스가 된다. 실적이 나올 때마다 CEO 사진과 함께 기업 재무 정보와 분석을 담은 외신 기사가 쏟아지는 이유다. 일본 소프트뱅크그룹의 손정의 회장도 이달 초 2분기 실적을 공개하는 자리에서 비전펀드 흑자 전환과 자사주 매입을 직접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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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적 발표 때 안 보이는 한국 CEO
주주와 투명하게 소통해야 밸류업
오너 연봉도 이젠 시장 감시 시대
」
반면에 우리 기업들은 CEO 대신에 경영지원실 임원이나 각 부문 부사장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시가총액 상위 5개 기업의 올해 2분기 실적 발표 때 CEO 대신 최고재무책임자(CFO) 정도만 참석했다고 한다. 기사에 인용된 어느 펀드매니저의 쓴소리가 신랄했다. “한국의 CEO는 올림픽에는 가도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이나 IR에는 오지 않는다.”
게다가 한국에선 기업 설명회 내용을 대부분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 미국·캐나다·호주·일본은 실시간 스트리밍을 하고 속기록을 홈페이지에 올린다. 덕분에 투자자 간에 정보의 비대칭성이 줄어든다. 증시를 키운다고 우리 정부가 기업 밸류업에 나섰다. 제도와 투자 환경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업인의 인식부터 바뀔 필요가 있다. 주주·투자자와의 적극적이고 투명한 소통이 밸류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업도 할 말이 있다. 애널리스트·펀드매니저가 묻는 건 주로 숫자다. 재무 정보를 가장 잘 아는 CFO가 답하는 게 낫다고 주장한다. 인수합병(M&A)이나 구조조정 같은 민감 이슈에 CEO가 답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말실수라도 나오면 뒷수습이 어렵다.
기업의 이런 하소연보다 더 본질적 이유는 그간의 학습효과와 이로 인해 굳은살로 박힌 저자세의 기업 문화가 아닐까 한다. 권위주의 시대는 물론, 민주화 이후에도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한국적인 경영 환경은 여전하다.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95년 “우리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 기업은 2류”라고 작심발언을 했다. 국민과 기업인은 많이들 공감했지만 감히(!) 정부와 정치에 등급을 매긴 탓에 고초를 겪어야 했다.
오너 경영자는 오너라서, 전문경영인은 오너가 아니라서 선뜻 마이크를 잡지 않는 경향도 있다. 오너는 대기업 홍보실이 이미지 통합(PI·President Identity) 차원에서 쏟아내는 엄선되고 관리된 메시지에 안주한다. 전문경영인은 사실상 자신의 임면권을 쥔 오너의 심기를 살피는 게 우선이다. 다는 아니지만 많이들 그렇다.
지난주 주요 대기업이 공시한 상반기 임직원 보수를 보면 그룹 오너와 전문경영인 가운데 수십억~수백억원을 받아간 이가 꽤 된다. 대부분 그럴 만하니까 그랬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대체 회사 발전에 무슨 기여를 했는지 시장에서 갸우뚱하는 이들도 있다. 평소에 마이크 좀 잡고 주주와 투자자들과 소통을 충분히 했다면 설명이 될 수도 있었다.
최근 자본시장연구원 세미나에서 기업 경영진의 급여와 성과급을 주주총회에서 승인받게 하는 ‘세이온페이(Say-On-Pay)’ 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이제는 투자자들이 국경을 넘나드는 서학개미의 시대다. 투자자의 눈높이가 높아졌다. 오너 자리를 물려받은 3, 4세 경영인이 몸값을 제대로 하는지 지켜보는 시장의 눈초리가 매섭다. 이사 보수의 총한도뿐 아니라 보수 산정 기준 등 구체적 내용을 주총에서 결정하는 게 맞는 방향이다. 회장님·사장님·대표님, 고연봉 구설에 휘말리기 싫다면 마이크 잡는 연습들 부지런히 하시길 바란다.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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