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완벽한 집은 어디 있을까

권근영 2024. 8. 1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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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구상 당시 움직이는 조각으로 기획된 ‘공인들’(2024), 작은 사람 300여 명이 빈 좌대를 옮기고 있다. 권근영 기자

내가 사는 집을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다면? 집(home)은 장소가 바뀌어도 여전히 같은 집일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도시들을 국경 없이 연결할 수는 없을까?

아이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십중팔구는 쓸데없는 공상이라 일축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서도호(62)의 이같은 상상은 ‘서울 집/ LA 집/ 뉴욕 집/ 볼티모어 집/ 런던 집/ 시애틀 집/ LA 집’(1999)으로 실현됐다. 유년기를 보낸 성북동 한옥 모습 그대로 옥색 천에 바느질해 만든 이 집은 척척 접어 세계 각지에서 전시되며 이름을 알렸다.

서도호 개인전 ‘스페큘레이션스(Speculations)’는 바로 이 경계 없는 상상을 서울 율곡로 아트선재센터 3개층 전체에 펼쳐 놓았다. 우리말로 사변ㆍ사색을 뜻하는 전시 제목에 대해 지난 16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만약에(What if)라고 상정하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진행되는 작업 과정에 붙인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21년 전 국내 첫 개인전을 열었던 곳으로의 ‘홈 커밍’ 전시다. 리움미술관(2012), 도쿄 모리미술관(2015), 뉴욕 휘트니 미술관(2017, 2001), 워싱턴 D.C. 스미소니언박물관(2018) 등 국내외 주요 전시공간에서 개인전을 연 그가 돌고 돌아 출발점에 섰다.

이번 전시엔 ‘서도호’ 하면 떠오르는 천으로 된 집은 없다. 서도호는 미국에 유학하던 1991년부터 쭉 같은 규격의 스케치북에 생각나는 대로 그리고 기록해 왔다. 2003년부터는 여기 담긴 아이디어를 하나둘 시각화하기 시작했다. 전시는 제한 없는 상상을 담은 스케치북 드로잉과 영상·모형이 중심이다. ‘가장 작은 집’인 옷부터 개인이 세상과 만나는 ‘집’, 개인과 공동체 등 서도호가 품어온 질문의 원형들이다.

북극에 ‘완벽한 집’을 상상하며 혹한을 견딜 구명복을 만든 서도호. [사진 아트선재센터]

과거 성북동 한옥 스튜디오를 방문했을 때 서도호는 “진짜 핵심은 ‘생각하는 것’”이라며 “간혹 물화(物化)와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배보다 배꼽이 커지지만, 그게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작품의 디테일이 눈길을 끌지만 본질은 그 안에 담긴 생각이라는 얘기다.

전시된 ‘생각들’의 3분의 1 정도는 이미 실현됐다. 2010년 리버풀 비엔날레에서 영국의 좁은 두 건물 사이에 비스듬히 끼어 있던 한옥이, 미국 UC 샌디에이고 공대 건물 옥상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오두막, ‘별똥별’(2011)이 그렇다. ‘나만의 공간’에 예민한 작가의 관심은 국적을 불문하고 갈수록 자기만의 공간을 갖기 어려운 도시인들의 공감을 얻었다.

미국 UC 샌디에이고 공대 옥상 끄트머리에 설치된 ‘별똥별’(2011)의 1/23 축소 모형. [연합뉴스 ]

“처음에 그릴 때는 전혀 이루어질 수 없겠다 여겼는데, 그걸 모형이나 애니메이션 등으로 시각화 하다 보니 실현할 기회가 오더라”고 그는 돌아봤다. 1998년 구상한 ‘공인들’은 지난 4월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미술관 정원에 설치됐다. 300여 명의 작은 사람들이 텅 빈 좌대를 받치고 있는 조각이다. 한 명의 위인보다는 이름 없는 다수에 눈길을 준 이 조각의 원래 구상은 키네틱 조각. 사람들이 좌대를 이동시키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조각 ‘공인들’(2024)이 전시장에 처음 공개됐다.

서도호의 요즘 질문은 “당신을 위한 완벽한 집은 어디 있을까?”다. 과거 살았던 서울·뉴욕, 그리고 지금 사는 런던까지 세 도시를 이은 가운데 지점인 북극 보퍼트해 인근에 ‘완벽한 집’을 짓겠다는 상상이다. 걸어서 갈 수 있는 다리를 만들고, 그 위에 대관람차를 세워 성북동 손칼국수 같은 자기만의 추억의 식당을 들이는 식이다. 이를 위해 코오롱스포츠와 혹한에 견딜 구명복을 디자인하고, 건축가·인류학자·생물학자·철학자 등과 협업한다.

그는 “종착역이나 목적지를 생각하지 않는 작업이다. 천축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풀어낸 ‘서유기’를 읽듯, 걸어서 그곳까지 가다가 만나는 환경문제, 해류와 유빙(流氷), 공해 상에 집을 짓고 새로운 나라를 선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까지 함께 공부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2003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연 개인전에서 그는 ‘유니폼’(1997), ‘썸/원(Some/One, 2001)’ 등을 내놓으며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에 질문을 던졌다. 목적도 계획도 없이 출발한 것 같은 생각들이 30년 가까이 다듬어지며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작품으로 구현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번 전시는 결과 중심의 이 사회에 어떤 질문을 던질까. 전시는 11월 3일까지, 성인 1만원.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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