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이 달랐던 친구의 밀고, 참수 당한 김개남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심심산골이다. 바위에 부딪혀 퍼렇게 멍든 물이 구불구불 힘겹게 빠져나가는 골짝이다. 이곳 하종성에서 김개남이 붙잡힌다. 산내 종성리는 상하(上下) 두 마을로 나뉜다. 용두봉과 그 자락이 전부인, 산이 곧 마을인 셈이다. 높은 봉우리 사이로 가끔 새가 날고, 고즈넉한 골짝은 평화롭다 못해 소슬하기까지 하다.
용두봉과 필봉산 사이 강을 막은 댐이 웅장하다. 거대한 옥정호를 품은 섬진강댐이다. 호수는 잔잔하고 푸르러, 여기서 격랑으로 일렁였던 역사를 읽어내기란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위급에 처할 때마다 이곳은 힘을 기르거나 저항의 장소로 선택되곤 했다.
바로 옆이 회문산이다. 6.25 전쟁 때 인천 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인민군이 산속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된다. 회문산은 그때 전북 도당의 아지트였다. 작가 이태(李泰)의 '남부군'이라는 소설 첫머리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이곳에서 지리산으로 쫓겨가기까지 이웃 청웅과 오수 등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긴 시간 반복되었다.
▲ 상종성 평전 능히 수만의 군사를 기르기에 넉넉한 산 정상의 드넓은 평전. 김개남은 재봉기를 도모하려 이곳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
ⓒ 이영천 |
하지만 결과적으로 믿었던 친구에게 배반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신의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이데올로기와 세계관의 차이였을까, 혹 벼슬자리가 탐났을까, 그도 아니라면 역적으로 몰린 친구를 보호해 주었다는 명목으로 후한을 두려워한 옹졸함의 발로였을까?
친구이기 전에
청주에서 패배한 김개남은 진잠과 연산 쪽으로 내려와, 고향 지금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종성리로 스며든다. 우선 매형에게 의탁하기 안성맞춤이다. 떠도는 이야기로 임병찬이 "자네가 있는 곳보다 이곳이 더 안전할 터이니 우리 집으로 오게"라며 안심시켰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옥구 출신으로 김개남보다 두 살 많은 임병찬(1851년생)은 아전 출신이다. 1867년 옥구 형방(刑房)이 그의 첫 벼슬이다. 이후 여러 관청에서 공훈을 세우며 승승장구한다. 26년간의 관리 생활을 접고, 1893년 종성리를 터전으로 삼는다.
1894년 발발한 동학혁명을 그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을지, 이후 그의 행적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도 훗날 목숨을 걸고 항일에 나섰고 죽음마저 김개남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1894년 겨울, 그때는 달랐다.
▲ 최익현과 임병찬 산내면 종성리 용두봉 자락 평전에서 8백여 군사를 길러 일제와 맞선 순창전투에서 둘은 나란히 체포된다. |
ⓒ 정읍시청 |
둘 사이는 친구였을까? 친구라면 신뢰가 바탕이다. 어떤 관계였을까? 이념이 다르다고, 목숨이 걸린 밀고에 나섰다. 차안대(遮眼帶) 찬 경주마처럼 협소한 그의 세계관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런 측면에서 '친구나 동무'는 아닌 듯하고 '벗'은 더더욱 멀어 보이며 조금 가까운 '지인' 정도로 추측해 본다.
▲ 임병찬 묘지석과 창의 표석 상종성 평전에 세워져 있는 임병찬의 묘비석과 창의 기념 표석. 이 부근에서 그의 모친 무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
ⓒ 이영천 |
화급한 참수
▲ 하종성 김개남이 붙잡힌 곳이 사진 우측의 작은 골짝이다. 사진 좌측의 급경사 도로를 오르면 상종성 평전이 나온다. |
ⓒ 이영천 |
▲ 김개남 피체지 푯말이 가리키는 곳이 피체지로, 소담한 찻집으로 이용되고 있다. |
ⓒ 이영천 |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만 군사 어디 다 두고 짚둥우리 웬 말이냐?"
▲ 피체된 자리 김개남이 피체된 자리엔 현재 소담한 찻집이 앉아있다. |
ⓒ 이영천 |
황헌주가 개남을 포박하여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 이도재가 심문하였다. 개남은 큰 소리로 "우리가 한 일은 모두 대원군의 은밀한 지시에 의한 것이다. 지금 일이 실패한 것 또한 하늘의 뜻일 뿐인데 어찌 국문한다고 야단이냐"고 하였다.
도재는 마침내 난을 불러오게 될까 두려워 감히 묶어서 서울로 보내지 못하고 즉시 목을 베어 죽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냈는데 큰 동이에 가득하여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투어 내장을 씹었고, 그의 고기를 나누어 제사를 지냈으며 그의 머리는 상자에 넣어서 대궐로 보냈다. (번역 오하기문. 황현.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5. p312)
뼈에 사무친 원한이 아니고서야, 그의 내장을 씹을 사람이 있었을까. 그의 살점으로 과연 제사를 지냈을까. 김개남이 죽인 어느 관리의 아들이 간을 씹었다는 풍문이 떠도나, 단연코 백성들은 그러지 않았다. 한양으로 보내진 그의 머리는 여기저기 떠돌며 효수된다. 나중엔 지방 각지로 보내져 조리돌림 당하기도 한다. 죽어서까지 치욕이다.
▲ 김개남 동학혁명의 주역이었던 김개남. |
ⓒ 정읍시청 |
혁명 실패라는 설운 물줄기가, 이곳 백성마저 휘감아서일까? 종성리 섬진강 물길도 종내 커다란 격랑을 맞게 된다. 잘 흐르던 물이 갇히고 물길이 바뀐다. 강에 기대 대대로 살아오던 사람들도 쫓겨난다.
▲ 섬진강댐(1968) 정읍 산내면 종성리(용두봉)와 임실 강진면 용수리(필봉산) 사이를 막아 들어선 섬진강댐. 이로 인해 드넓은 옥정호가 생겨났다. |
ⓒ 임실군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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