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삼쩜영] 봉숭아 물들이기, 이게 오리지널입니다
그룹 '육아삼쩜영'은 웹3.0에서 착안한 것으로, 아이들을 미래에도 지속가능한 가치로 길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서울, 경기도 가평, 부산, 제주,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보호자 여섯 명이 함께 육아 이야기를 씁니다. <기자말>
[원미영 기자]
"엄마, 아라가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여왔는데 너무 예쁘더라. 나도 하고 싶어!"
요즘 부쩍 외모에 관심이 커진 딸아이가 하교 후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봉선화(봉숭아)는 어렵지 않게 마주치는 친숙한 꽃이었다. 당시 살던 동네는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앞집 영수네 밥숟갈이 몇 개인지, 뒷집 은희네 할아버지 제삿날이 언제인지 모르는 이웃이 없었다. 사생활이라고는 없는 시끌벅적한 동네 분위기를 떠올리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도 은근한 그리움이 몰려온다.
요즘 같으면 절도죄로 잡혀갈지 모르지만 그땐 담벼락 아래에 핀 봉숭아꽃을 따가도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곱게 찧은 봉숭아를 작은 손톱에 올리고 헝겊을 감싸 명주실로 친친 감아주던 엄마는 아마 지금 내 나이쯤이었을 것이다. 자다 일어나면 몸부림에 달아난 꽃 반죽이 손톱 대신 이불을 물들이기 일쑤였다. 언니, 동생과 알록달록한 꽃을 따던 기억, 친구들과 첫눈이 올 때까지 꽃물이 남아있을까 내기했던 것을 떠올리니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
가성비 좋은 '봉숭아 물들이기'
추억팔이도 잠시, 당장 아이가 찾는 봉숭아꽃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아이는 어디서 들었는지 다이소에서 파는 '봉숭아 물들이기'로 하면 된다고 했다. 실제로 다이소 봉숭아 물들이기는 가성비 좋은 천원의 행복으로 유명했다. 봉숭아꽃을 딸 필요도, 밤새 손톱 위에 꽃을 올려놓을 필요도 없이 물에 갠 가루 반죽을 손톱에 올려 10분에서 30분만 기다리면 완성이다.
딸은 사주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나를 보챘다. 아이와 마법(?)의 가루를 사기 위해 다이소에 들렀다.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손바닥보다 작은 마법의 가루를 보니 세상 참 편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현실이 되고, 다가오는 미래에는 또 어떤 대단한 것들이 생겨날까 두려움과 기대가 교차했다.
마법의 가루 성분은 소귀나무속 추출물이었다. 소귀나무는 우리나라 제주, 대만, 중국, 필리핀에 자생하는 나무로 나무껍질에 염료 성분이 있어 천연염색이나 화장품의 원료로 쓰이기도 한단다. 봉숭아 없는 봉숭아 물은 자세히 보니 '봉숭아 빛 물들이기'로 적혀있었다. 붕어 없는 붕어빵, 바나나맛 우유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두리번거리다 진열된 꽃씨가 눈에 띄었다. 봉선화!
"우리 봉선화 꽃씨 사서 심어볼까?"
딸아이는 호기심 반, 걱정 반인 얼굴로 물었다.
"그럼, 지금 당장 물들일 수 없잖아?"
"그렇긴 하지. 근데 꽃씨 심어서 물도 주고, 직접 키운 꽃으로 손톱에 물들이면 너무 멋질 것 같은데?"
고뇌하던 그녀의 승낙이 떨어졌다. 우리는 계획과 달리 봉선화, 내친김에 채송화와 코스모스 씨앗까지 손에 쥐고 그곳을 나왔다.
▲ 기다림의 미학 -6월 1일 봉숭아 꽃씨를 심다. 싹이 올라오고 봉황을 닮았다는 꽃이 폈다. 봉숭아 꽃을 따는 꽃보다 예쁜 딸. 꽃물들이기 준비물로 명반과 절구방망이를 준비했다. |
ⓒ 원미영 |
마침내 흙 속에서 빼꼼히 연둣빛 싹이 올라왔다. 떡잎이 나고 본잎이 났다. 가느다란 줄기가 굵어지고 뾰족한 잎들이 자라나는 시간을 우리는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봤다. 불볕더위와 장마를 이겨낸 8월, 드디어 바라고 바랐던 꽃이 달렸다. 꽃이 떨어진 자리엔 손대면 톡 터질 것 같은 씨앗이 달렸다.
빨간색, 자주색, 짙은 분홍색, 연한 분홍색, 흰색까지 다양한 색의 꽃이 달렸다. 봉선화 씨앗과 함께 사 온 채송화는 불량이었는지 싹이 나지 않았고, 코스모스는 무럭무럭 자랐다. 어느새 코스모스는 키가 내 허리까지 왔다. 집을 나설 때마다 담벼락 아래에서 하늘거리는 바람개비 같은 꽃이 말을 거는 듯했다.
곧 가을이라고.
▲ 딸아이가 딴 봉숭아꽃- 봉숭아는 꽃과 잎, 줄기에도 색소가 있다고 한다. |
ⓒ 원미영 |
맘에 드는 꽃을 따고 잘생긴 초록 잎도 땄다. 착색이 잘 되도록 돕는 명반(백반)도 조금 넣어 절구에 빻았다. 요즘 수요가 많지 않아 구비해두지 않는다는 명반은 약국을 세 군데나 들러 사 온 것이었다. 내 또래의 약사님께 명반을 달라고 하니 "봉숭아 물들일 거예요?" 하며 물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약사님도 나도 말하지 않아도 아는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점점 간편한 것들로 시간을 벌고 에너지를 덜어낸다. 나조차도 손이 많이 가고 번거로운 것보다 손쉬운 것들을 먼저 택할 때가 많다. 하지만 당연하게 추구하는 편리와 효율이 낭만과 추억을 점점 앗아가는 것 같아 씁쓸하다. 언젠가 내가 기억하는 고운 것들이 흘러가는 시간에 모두 휩쓸려 가버릴까 맘을 졸인다.
곱게 빻은 꽃 반죽을 손톱 위에 올렸다. 아들도 새끼손톱에 물을 들였다. 첫눈이 올 때까지 꽃물이 남아 있다면 첫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오글거리는 멘트도 잊지 않았다. 아이들은 자기네들은 모솔(모태솔로)이라 그럴 일은 없다며 킥킥거렸다.
▲ 주홍빛 여름 -봉선화 줄기와 잎자루엔 크고 풍부한 꿀샘이 있어 개미들의 놀이터가 된다. 꽃반죽을 올린 아이의 손! 첫눈이 올 때까지 꽃물이 남아있을까? 꽃씨를 심고 두 달만에 알록달록 여러가지 색의 봉숭아 꽃이 폈다. |
ⓒ 원미영 |
아이를 길러내는 과정 또한 그러하리라. 세상 밖으로 나아갈 아이들은 앞으로 숱한 시련을 마주할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견디고 잘 이겨낼 것이라 믿는다. 바람에 흔들리고 잎이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할 일은 그 과정을 묵묵히 기다려주는 것뿐이다. 다만 아이들이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맘껏 뻗어나갈 수 있는 기름진 땅이 되어주고 싶다.
주홍빛 여름날의 꽃물이 내 아이들의 유년 한 자락을 곱게 물들였기를 바란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