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광장' 지정은 이래서 위험합니다
[서부원 기자]
▲ 14일 오전 동대구역 앞에서 열린 '박정희 광장 표지판 제막식'에서 홍준표 대구시장 등 관계자들이 표지판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2024.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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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하건대, 그 어떤 이유로든 이번 결정은 퇴행적이다. 파란만장했던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숱한 사건과 인물들을 오롯이 품고 있는 역사 도시 대구가 '박정희의 도시'로 규정되는 건 온당치 않다. 홍 시장은 한술 더 떠 대구 도서관 공원도 '박정희 공원'으로 명명하고, 곳곳에 동상까지 설치할 계획이라고 밝힌 터다.
전제해 둘 게 있다. 개인적으로, 도시든, 거리든, 건물이든, 후세로부터 존경받는 역사 인물의 이름을 내거는 데 대해선 찬성하고 환영한다. 가장 뜻깊은 추모이자 미래세대를 위한 이보다 더 실효적인 교육은 없다고 믿는다. 이미 해외에서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았으며, 국내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시나브로 늘어나는 추세다.
대구를 대표하는 인물을 물었더니
예컨대, 프랑스의 관문인 파리 국제공항의 이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 정권에 맞서 망명 정부를 이끈 '샤를 드골'이다. 미국 뉴욕의 국제공항도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이름을 땄다. 그렇다고 정치인의 이름만 사용되는 건 아니다. 폴란드 바르샤바와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제공항은 세계적인 음악가인 '프레데릭 쇼팽'과 '페렌츠 리스트'를 기리고 있다.
이웃한 중국에서도 드물지 않다. 중국 내 어느 도시를 가나 중심가의 이름은 예외 없이 중산로다. '중산'은 14억 명의 모든 중국인이 존경하는 쑨원의 호다. 그는 1911년 봉건왕조 청을 무너뜨린 불세출의 혁명가다. 중국은 물론, 현재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일촉즉발의 정치적 갈등을 벌이고 있는 대만에서도 국부로 칭송하는 인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읍면동 단위의 행정구역이나 좁은 도로명에서 이따금 등장한다. 일례로, 강원도 춘천시에는 김유정면이 있다. 저 유명한 소설 <봄봄>과 <동백꽃>의 작가다. 강원도 영월군에는 김삿갓면도 있다. 그곳에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의 묘소가 있어서다. 멀리서 찾을 것 없이, 국가의 균형 발전을 위해 조성된 행정수도의 이름도 우리 겨레의 큰 스승 '세종'이다.
이태 전 광주를 찾아온 대구 시민들을 대상으로 역사 강의를 했던 적이 있다. 이른바 '달빛 동맹'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지난 2009년 달구벌 대구와 빛고을 광주 사이의 교류를 활성화하여 해묵은 지역 갈등을 극복하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최근 추진 동력이 급격히 약화한 분위기지만, 사업의 필요성에는 광주와 대구 시민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
강의를 시작하며 화두를 던졌다. 대구 시민으로서 각자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도시를 대표하는 인물이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워낙 큰 도시인 데다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어서, 온갖 다양한 이름들이 거론될 줄 알았다. 개중에는 역사 교사인 나도 모르는 인물들도 있으리라 은근히 기대하며, 자연스럽게 광주와 대구의 역사를 버무려 설명할 요량이었다.
놀랍게도 대답은 사전에 입이라도 맞춘 듯 똑같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노태우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이 뒤를 이었다. 드물게는 전두환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을 꼽기도 했다. 이렇게 다섯 명이 전부였다. 조선시대 서울, 평양과 더불어 3대 도시의 하나였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본향이자 현재까지도 영남의 맹주 역할을 하는 대구에서 떠올릴 인물이 고작 이 다섯 명뿐이라는 게 안타까웠다.
그마저 전부 대통령이라는 당대의 권력자만 거론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기실 박정희와 전두환, 김수환은 대구가 고향도 아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대구에서 각각 사범학교와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김수환은 천주교 대구대교구를 관장하다 추기경으로 서임되어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 천주교회를 대표했다.
대구가 박정희로 과잉 대표되면서, 지역이 품은 다른 역사와 인물들은 모조리 가려지거나 지워진 모양새가 됐다. 대구의 진산 팔공산 역사의 팔 할이랄 수 있는 태조 왕건과 충신 신숭겸조차 박정희의 '적수'는 못 되는 듯하다. 비슬산 자락 남평 문씨 세거지를 품고 있으면서도 원으로부터 목화씨를 전래한 문익점을 떠올리는 경우는 단 한 명도 못 봤다.
박정희에 가려진 대구의 인물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도동서원에 배향된 김굉필도,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투항해 왜군에 맞선 '항왜' 사야가 김충선도 떠올릴 만한 인물이다. 고려나 조선의 역사가 너무 멀게 느껴진다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대구를 언뜻 살펴도 열 손가락으로 부족하다. 당장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서상돈과 3.1 만세 시위를 주도한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학생들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을 기리는 '3.1 운동 계단'은 기실 대구를 대표하는 여행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중국군과 함께 항일 독립전쟁을 이끈 이상정도 맨 앞에 거론될 수 있다. 그는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어머니'로 불리는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의 남편이기도 하다. 또, 그의 동생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저항시로 평가되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너의 침실로>의 작가 이상화다.
독립운동의 침체기였던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장진홍도 대구를 대표할 만하다. 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의열단원 이육사도 대구와 인연이 깊다. 그가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한 곳이 바로 대구다. <절정>과 <청포도>라는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시인으로만 기억하기에는 독립운동가 이육사의 공적은 너무나 크다.
한편, 1946년 10월 대구 농민 항쟁의 주역, 박상희도 당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해방 직후 극심한 좌우 대립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미군정의 실정으로 식량난이 겹치면서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항쟁의 불길이 치솟는다. 친일파를 중용한 미군정은 강경 진압에 나섰는데, 그 와중에 내로라하는 사회주의 이론가였던 그는 미군에 총살당하고 만다.
해방 후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렸다. 사회주의를 수용한 지식인들의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곳이었으며, 특히 박상희의 역할이 컸다. 이는 그의 동생이었던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담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이 족쇄가 되어 박정희는 스스로 좌익이 아니라는 걸 평생 대내외적으로 증명해야 했다. 5.16 군사정변 직후 '반공을 국시'로 삼은 건 그래서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조차 멀다면,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효시로 평가되는 1960년 4.19 혁명 당시의 대구를 살펴보자. 이승만의 하야로 귀결된 4.19 혁명의 시작은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주도한 2.28 민주운동이다. 2.28이 3.15 의거로 이어지고, 한 달 뒤 4.19로 폭발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대구의 청년 학생들에게 빚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듬해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 때도 대구는 걸출한 인물들을 낳았다. 당장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이름부터 떠오른다. 유신정권의 극악한 노동 탄압에 맞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스스로 몸에 불을 당긴 그는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담벼락에 기댄 남산동의 허름한 뒷골목에서 태어났다.
그의 숭고한 삶을 기록한 <전태일 평전>의 저자 조영래 변호사 역시 대구 사람이다. 그는 서울대 졸업 후 사법시험을 준비할 당시 전태일의 분신 소식에 충격을 받아 평생을 사회적 약자들 곁에서 인권 변호사로 살았다. 불과 마흔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까지도 직역을 넘어 모든 법조인의 표상과 같은 존재로 우뚝하다.
그런가 하면, '영원한 가객' 김광석도 대구가 낳은 인물이다. 대구를 찾아온 여행자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들르는 곳이 신천대로 변 그가 태어난 곳에 조성한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다. 그는 요절했지만, 도심공동화 현상으로 경제적 침체에 허덕이던 주변 상권을 일약 전국적인 '핫스폿'으로 일으켜 세운 일등 공신이 됐다.
모든 이에게 두루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어야
더 쓰자니 '논문'이 될 성싶어 여기서 멈춘다. 대구 사람도 아닌 데다, 대구와 아무런 인연이 없는 내가 노트북 앞에서 언뜻 떠올려 본 대구 출신 인물만 해도 이 정도인데, 이구동성 박정희만 외쳐대는 대구 시민들의 모습이 의아할 따름이다. 더욱이 시민 대다수가 우리 사회의 주류 기득권층, 곧 '강자'와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듯해 적잖이 당혹스럽다.
팔공산 자락 노태우의 생가가 성역화되어 있고, 전두환이 졸업한 대구공고에는 그가 심었다는 나무가 봉황을 새겨놓은 표지석 뒤에 당당하게 서 있다. 교정에 세워진 정자 이름조차 전두환의 호를 딴 '일해정'이다. 오래전 대법원의 판결로 종지부를 찍었고, 역사적 평가도 이미 끝난 그들의 천인공노할 악행조차 대통령이라는 '감투'에 의해 말끔하게 세탁된 모양새다.
요컨대, 박정희 광장 지정은 유구한 대구의 역사가 박정희를 경계로 전후가 단절되는 결과를 초래할 공산이 크다. '박정희 이전의 대구'는 지금의 대구와 무관하다는 인식이 보편화하게 될 경우, 대구는 박정희가 일군 도시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마치 대한민국이 1919년 임시정부가 아닌, 1948년 정부 수립으로 시작됐다고 막무가내로 우겨대는 뉴라이트 세력의 의도와 같은 맥락이다.
더욱이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박정희만큼 역사적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경우는 드물다. 친일반민족행위자, 남로당 조직책, 독재자, 반공주의자, 구국의 영웅 등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은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물구나무선 원인을 짐작하게 한다. 하물며, 광장과 같은 공공시설에 이름을 붙이려면, 적어도 모든 이들이 두루 존경하는 인물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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