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통해 마주한 과거의 나, 그렇게 우리는 나아간다
[김상목 기자]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때론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 마르셀 프루스트
▲ 영화 스틸 이미지 |
ⓒ 찬란 |
폴은 2살 때 부모를 잃었다. 이후로 그는 말을 잃어버렸다. 다행히 이웃에 살던 두 이모 덕분에 천애 고아 신세는 면했다. 폴은 3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이모들과 함께 살고 있다. 두 이모는 댄스교습소를 운영한다. 폴은 그곳에서 피아노 연주로 댄스의 흥을 돋운다. 그런 일상은 매일 반복된다. 마치 24시간 일과를 복사해 붙인 듯한 폴의 시간이다. 그는 매년 유망한 신예를 발굴하는 피아노 경연대회에 출전하지만 늘 미끄러진다. 어느새 33살이 된 그에게는 올해가 신인 경연 출전 마지막 기회다. 이모들은 그가 입상해 음악가로 명성을 얻기를 원한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폴의 의중은 알 도리가 없다.
그의 생일에 모여든 이모와 지인들은 정성 넘치는 선물을 보내지만, 폴에겐 딱히 흥미가 보이지 않는다. 실어증 때문에 대화 대신 현관 옆 칠판에 들를 장소의 정보를 적어두고 드물게 외출하기도 한다. 외출의 주요 목적은 자신에게 신경안정제 역할을 담당하는 달콤한 디저트 '슈케프'를 사러 동네 제과점에 들르는 경우다. 간혹 공원으로 산책하기도 하지만, 슈케프가 떨어지면 평정을 잃기 때문에 대부분 그 보급이 주요 과제다.
폴이 더부살이하는 이모들의 집은 파리의 풍경 중 일부가 된 오래된 아파트다. 관리인이 있긴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자주 고장이 나기 일쑤다. 그 덕분에 계단을 하염없이 오르내려야 하는 날이 종종 생긴다. 그 과정에서 이모들의 지인인 시각장애인이 복도에서 흘린 레코드를 돌려주려는 폴은 엉겁결에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던, 아래층 마담 프루스트의 집에 들어서게 된다. 마담 프루스트는 아파트 내에 금지된 텃밭 급의 비밀정원을 가꾸고 있었기에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폴이 그 비밀을 접하고 만 것이다.
▲ 영화 스틸 이미지 |
ⓒ 찬란 |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을 소화하기 위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안 읽고는 차원이 다른 체험이 된다. (물론 필자 역시 온전히 독파하지 못했다) 7권, 4000쪽에 달하는 근대 모더니즘 문학의 아이콘을 완독하는 건 그야말로 난제다. 하지만 대략 개요라도 알고 본다면 제작진의 의도를 간파하는 데 큰 문제는 없다.
우선 프루스트의 소설 속 주인공 이름부터 '마르셀'이다.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아틸라 마르셀'이다. 극 중에선 별도 의미가 부여되긴 하지만, 마르셀 프루스트의 인용을 통해 아주 간단하게 두 작품의 연결고리가 결속된다. 폴이 잘 알지 못하고 오해하던 아빠의 이름이 바로 '아틸라 마르셀'이다. 자연히 그 아들인 폴의 성도 마르셀이 될 테다.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 모두 꿈을 통해 과거 기억을 소환한다. 복잡하게 뒤엉킨 실타래처럼 꼬인 꿈의 심연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 애쓴다. 그 위험한 모험을 통해 억압당해 온 심연의 진실이 개방된다. 기나긴 터널을 되짚어간 덕분에 과거의 족쇄에서 풀려난 주인공은 이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 꿈으로의 진입을 돕는 기제는 (프루스트 소설과 똑같이) '마들렌'과 차다. 이쯤 되면 감독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살짝 소름 돋을 정도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문장으로 거대한 풍경화를 그려냈다면, 실뱅 쇼메는 최초의 실사 영화를 통해 이미지로 프루스트의 텍스트를 재현하려 도전한다. 이미 <일루셔니스트>와 <벨빌의 세 쌍둥이> 같은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애니메이션을 선보인 감독이 굳이 실사 영화에 도전하는 건 자신이 구현하려는 영화 세계를 위한 최적의 방식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가능한 일이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 도전할 고지의 험준함을 고려하면 아찔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감독 장기인 애니메이션의 눈부신 이미지가 (정확한 연도 따위는 무의미한) 초현실적 풍경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든 황홀경은 그 자체가 배경 해설 기능을 톡톡히 수행하며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그리고 감독은 원한 바를 완수한다.
▲ 영화 스틸 이미지 |
ⓒ 찬란 |
영화 속에서 경쟁의 수단이던 피아노는 함께 즐기는 우쿨렐레로 교체된다. 늘 혼자이던 주인공은 다른 외로운 이와 교류하며 성장한다. 직면하기 두려운 과거의 진실, 새로운 상실을 겪은 덕분에 폴은 그의 부모처럼 새로운 동반자와 가족을 이루는 데 성공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작품 제목과 일치되는 서사다. 시대와 배경을 초월해 공감을 획득하는 성장기는 아마 오랫동안 현대 사회의 상처받고 외로운 이들에게 어떤 상담 클리닉보다 소중한 위안이 되어줄 테다.
그런 영화의 마법(?) 덕분에 국내에서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무려 3번에 걸쳐 재개봉한다. (어쩌면 앞으로도 몇 번 더 재개봉할지 모를 일이다) 프랑스인이라면 친숙해도 국내에선 생소한 원제를 '초월 번역'으로 개봉 제목을 정한 탁월한 선구안 역시 '프루스트'라는 이름과 그 영향력이 갖는 함의에 통달한 배급사의 혜안 덕분에 가능했던 경우다. 그저 알기 쉽게 의역한 게 아니라 제대로 작품의 핵심을 간파한 드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역시 명불허전의 마르셀 프루스트다.
▲ 영화 포스터 이미지 |
ⓒ 찬란 |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Attila Marcel
2014 | 프랑스 | 코미디
2024.07.24. (재)개봉 | 106분 | 전체관람가
연출 실뱅 쇼메
주연 귀욤 고익스(폴 / 아틸라 역), 앤 르니(마담 프루스트 역)
출연 베르나데트 라퐁(애니 이모 역), 엘렌 뱅상(안나 이모 역),
파니 투롱(아니타 역), 루이스 레고(코엘로 역), 케아 카잉(미셸 역),
장 클로드 드레퓌스(크루진스키 역), 시릴 쿠통(의사 역), 벵상 드니아르(제제 역)
수입/배급 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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