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거리 추천해달라니 토박이도 한참 머뭇…"역사만 있지 놀곳 없는 광주" [노잼도시]
<2>'노잼도시' 프레임에 갇혀버린 도시들
③광역시인데 5성급 호텔·쇼핑몰 無
차별·소외 역사 "노잼논란도 반발 없이 수용"
ACC·동리단길…꿀잼 스팟도 인정 못 받아
편집자주 - 재미없는 도시, 이른바 '노잼도시'를 아시나요? 놀거리·볼거리·즐길거리가 부족해 현지인은 심심하고 타지역에서는 방문하지 않는 도시를 말합니다. 2019년부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여러 도시를 두고 노잼도시라는 호칭을 붙였는데요. 재미로 시작된 일종의 '밈'이 대전, 울산, 광주, 청주 등에서는 지방자치단체의 '꿀잼도시 만들기 프로젝트'로 이어질 정도입니다. '노잼' 오명을 쓴 도시는 정말 재미없고 따분한 곳일까요? 도시를 재미있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와 공간에 대해 고민을 해보고자 합니다.
"부산은 바다가 있는데, 광주는 그런 자연경관이 없고. 딥(deep)한 역사가 있어서 그런지 재미지게 놀만 한 것들은 많지 않아요."
지난달 30일 광주송정역 안 관광안내소에서 만난 한 직원은 '광주가 노잼도시라는 얘길 들어본 적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광주가 노잼도시라는 말은 솔직히 인정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관광지를 안내하며 광주의 재미를 홍보하는 입장에서 이러한 질문이 난감한 듯 한참을 망설이다 꺼낸 대답이었다. 그러면서 "5·18민주화운동 유적지나 공연마루 같은 볼거리들을 깨알같이 소개해드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지인도 "놀 곳 ·갈 곳 몰라"…호텔 등 관광 인프라 부족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라는 밈(meme·인터넷 유행어)이 있다. 한 웹툰에서 파생된 것으로, 원래 있던 것이 감쪽같이 사라진 황당한 상황을 말하는 유행어다. 광주 시민들에게 '노잼도시 광주'에 관해 물었을 때 돌아온 답변을 이 밈을 차용해 요약하자면 딱 이렇다. '없었는데요, 네 없었습니다.'
이날 동명동 카페거리에서 만난 박유진 양(18)도 "광주엔 놀 곳이 없다"며 열변을 토했다. "광주가 노잼도시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느냐"고 한마디 건넸을 뿐인데 "서울에서 온 선생님이 광주는 어디에서 노느냐고 묻길래 다시 서울로 가시라고 했어요"라며 "광주는 노잼도시 맞아요. 서울과 비교했을 때 없는 게 너무 많아요"라고 답답함을 드러냈다.
기자가 만난 광주 시민들에게 갈만한 곳을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여럿이 광주 시내가 아니라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담양이나 화순을 추천했다. 마치 두 지역을 광주의 일부로 여기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광주를 방문한 외지인도 입을 모아 '광주를 잘 모른다'고 했다. 기아 타이거즈 야구 경기를 보러 광주에 왔다는 채서원씨(22)는 "야구 때문에 당일치기로 왔다. 경기만 보고 바로 돌아갈 것"이라며 광주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광주송정역에서 친구를 기다리던 대학생 김모씨(20)도 "친구가 조선대를 다니는데 자취방에 놀러 오라고 해서 왔다"며 "광주에 유명한 게 뭐가 있는진 모른다"고 답했다.
광주 토박이라는 50대 택시 기사 최모씨도 광주 볼거리를 추천해달라는 말에 "정말 없다"며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는 "광주 평생 살았어도 놀 데가 없다. 진짜 없다. 이상하다"며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시민들은 광주가 광역시임에도 불구하고 기반시설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가장 많이 언급한 것은 대형복합쇼핑몰이다. 오늘날 복합쇼핑몰이 쇼핑뿐만 아니라 여가, 체험 등 다목적 공간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광주에는 이러한 수요를 충족해줄 곳이 없다. 편집숍, 디자이너 브랜드가 자리 잡은 충장로가 있긴 하지만 규모는 크지 않다. 동리단길의 한 카페에서 일하는 대학생 정혜준씨(23)는 "충장로도 정말 작아서 별로"라며 "광주에도 핫한 팝업스토어가 들어오면 다들 좋아할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는 광역시 중 유일하게 5성급 호텔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33개), 제주(20개), 부산(10개)에 있는 5성급 호텔 숫자와 비교하면 초라한 숙박 인프라다. 광주에서 큰 행사를 유치해 방문객이 늘어나도 이들을 수용할 호텔이 없어 여수, 목포 등으로 방문객이 새어 나가고 있다는 것이 광주 시민들의 설명이다. 호캉스 트렌드는 물론 관광객들의 체류 시간을 보장해주기 어려운 것이다.
ACC 등 명소 있지만…역사적 배경 맞물려 '노잼 수용'
광주 지역민들은 '노잼도시'가 주는 단어의 부정성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었다. 다른 도시 사람들처럼 자부심을 갖고 '우리 노잼 아니다'라고 반발하지도 않았다. 차별받던 호남의 한(恨)의 정서가 이런 분위기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부터 광주는 유배지였던데다, 민주화운동의 성지임에도 소외받았던 현대사 등이 광주 시민들의 무력감에 영향을 미쳤고, 이것이 '노잼의 수용'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지역 전문가들은 광주가 재미를 찾기 위해서는 '있는 것부터'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광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다는 것은 '꿀잼도시'가 될 수 없는 가장 큰 약점이다. 대전은 성심당, 울산은 태화강과 고래처럼 지역 명소나 이미지는 놀 거리를 찾아 떠나는 관광객들의 목적지 선택에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광주는 현재 지역이 가진 자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니 지역 브랜드와 정체성을 만드는 작업을 시도조차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광주에도 외부에서 조명하지 않았으나 명소들은 존재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 대표적이다. ACC는 유명 건축가 유현준 교수가 '한국에서 꼭 봐야 하는 건축물 TOP3'로 꼽은 곳이다. 5·18민주화운동 성지인 옛 전남도청과 전일빌딩 근처에 있어 접근성이 좋은 데다, 자연경관을 해치지 않도록 무등산 자락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낮고 둥근 형태로 지어졌다. ACC 안내데스크 직원은 "입지 조건이 좋아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며 "ACC 등에 재미 요소가 집중돼 다른 곳은 상대적으로 재미없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라고 했다.
기자가 방문한 날 ACC에서는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생전에 수집했던 거장 파블로 피카소 도예 작품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방문객들도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7세 자녀와 함께 피카소 전시를 보러 왔다는 김모씨(30대·전북 전주시)는"아이들 체험시설이 잘돼 있어서 아기들을 데려오기 좋다"고 호평했다. 광주 시민인 홍예빈 양(18)은 "친구와 공부도 하고 시간 보내려 방문했다"며 "여기가 광주에서 제일 좋은 건축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동리단길은 지역민들에게 호평받는 인기 장소다. 평일 오후에 찾은 동리단길은 거리에 줄지은 카페·식당마다 MZ세대(밀레니얼+Z세대)로 북적였다. 18개의 대학이 몰려있는 도시인만큼 젊은 인구들이 많았다. 카페 거리라는 명성에 걸맞게 원두 산지 에티오피아의 벽화부터 시작해 이국적인 양식의 건축물이 눈에 띄었다. 서울 성수동·을지로와 이태원을 합쳐놓은 듯 아기자기하면서도 독특한 느낌이다. '골목길 경제학자' 모종린 연세대 교수도 동명동과 양림동을 두고 "전국 최고 수준"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광주는 있는 자원뿐 아니라 새로운 자원을 마련하는 데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현재 광주시는 '꿀잼 광주'를 만들기 위해 사계절 특화 축제 개발, 영산강 Y 프로젝트 등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2028년을 목표로 복합쇼핑몰도 유치할 계획이다. 시는 더현대 광주, 그랜드 스타필드 광주 광주 신세계 아트 앤 컬처 파크를 통칭하는 이른바 '복쇼 3종 세트'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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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박현주 기자 phj0325@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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