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 인생의 큰 복을 사왔습니다

정슬기 2024. 8. 1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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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 아닌 업라이트 진짜 피아노 사던 날... 딸에게 숨구멍으로, 평생 친구로 남아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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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슬기 기자]

'맑은 소리~ 따당따당, 고운 소리~ 따당따당, OO피아노'

어릴 때 자주 듣던, 추억의 cm송으로 유명한 피아노 전시장에 며칠 전 다녀왔다. 한참 전부터 전자 피아노 말고, 진짜 피아노를 소망하던 큰 딸아이에게 이제는 정말로 진짜 피아노를 사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부피가 크고 층간 소음이 걱정돼 지금까진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7살부터 중2가 된 지금까지 꾸준히 피아노를 즐겨 치고 이제 디지털 피아노와 일반 피아노의 터치감이나 소리 차이를 현격히 감지하는 딸아이를 보며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못 가졌던 피아노지만
▲ 피아노 전시장에서 연주해보는 아이
ⓒ 정슬기
어디서 피아노를 사면 좋을까 수소문하는 사이 내 마음도 두근두근 설렜다. 사실 피아노는 내게도 선망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처음 집에 디지털 피아노를 들이던 때처럼 다시 한번 가슴이 뛰었다.

나는 어릴 적 피아노를 좋아했지만 피아노를 꿈꿔본 적도 가져본 적도 없는 어린아이였다. 그땐 먹고사는 것만도 빡빡한 시절이었다.

피아노를 처음 본 건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2학년 때 짝꿍 집에서였다. 산동네에 살던 나는 친구집이 멀끔한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구조의 아파트인 것도 모자라, 거실 한가운데에 거대한 피아노가 있음에 깜짝 놀랐다.

그 피아노는 학교에서 선생님이 쳐주시던 풍금보다 멋졌고, 소리도 좋았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내게 친구가 피아노 뚜껑을 열고 건반을 두드려 보였을 땐 마치 동화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피아노에 대한 로망을 갖게 된 건 아마그게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문턱이 닳도록 친구 집을 드나들었고 친구에게 피아노 치는 법도 배웠다. 아마 피아노를 갖고 놀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텐데 나는 계이름도 악보도 볼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 없이 배우는 피아노 연주도 나름은 쓸 만했다.

우리는 2학년때부터 3학년때까지 한 반이었는데 그 사이 나는 제법 어려운 곡도 완주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악보 보는 법은 몰랐지만, 도레미파시도 건반의 위치와 멜로디를 외워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

이 무식한 교습법이 효과가 좋았던 건지, 반복의 힘인지 나는 그때 배운 고양이 행진곡을 지금까지도 막힘없이 연주할 수 있다. 내가 어린 딸아이에게 처음 들려준 것도 바로 이 곡이었다. 딸아이도 어릴 때의 나처럼 발랄하고 경쾌한 이 곡을 좋아했고 나에게 더듬더듬 계이름을 배우며 피아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 가본 피아노 전시장은 공장을 끼고 있었다. 생각보다 규모가 꽤 컸고 그랜드, 디지털, 어쿠스틱 피아노 이외에도 기타, 드럼, 트럼펫 등 다양한 악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장으로 가는 복도에는 피아노 제작과정을 담은 패널이 걸려 있어 박물관에 온 듯한 느낌도 들었다.

복도 창밖 너머로는 수백 개가 족히 넘어 보이는 통나무들이 눈길을 끌었다. 아마 저 통나무로 피아노를 만드는 것 같다고 말하자 아이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 피아노 공장 통나무 수많은 통나무
ⓒ 정슬기
나는 아이들보다 더 신이 나 딸에게 어서 피아노를 쳐보고 마음에 드는 걸 고르라고 채근했다. 아이는 언제 피아노를 사달라고 했냐는 듯 사춘기 특유의 시크함을 뽐내며 건반 몇 개를 두드리더니 금세 피아노 하나를 골랐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를 연상시키는 우아한 검은색의 업라이트 피아노였다.

전시장에 함께 동행했던 엄마 아빠, 딸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내게 흰색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어릴 때 내게 피아노를 못 사준 게 늘 마음에 걸리셨다며 손녀딸에게라도 대신 사주고 싶다고 하셨다. 그 말을 하는 엄마의 눈이 슬펐다.

너무 큰 금액이라 죄송했지만, 감사히 받기로 했다. 우리는 가계약을 하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갔다.

그다지 좋은 내색이 없던 딸아이도 막상 차에 올라 타자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엄마, 피아노 오면 내가 골든아워랑 밀월 쳐줄게!"

새 피아노가 가져다줄 행복, 가져다준 행운
▲ 피아노 전시장 벽에 걸린 피아노 제작 설명서
ⓒ 정슬기
헌데 다음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나는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둘째 딸의 친구인가 싶어 얼른 전화를 받았는데 예상치 못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그분은 내 이름을 확인하더니 자신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입주민이라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당황스러운 나에게, 그분은 자기가 어제 다녀온 OO피아노 전시장의 대표라고 말씀하셨다.

알고 보니 그는 가계약된 문서를 보고 같은 아파트 주민인 걸 알고 반가워 전화를 주셨다고 한다. 입주민이니 피아노 무상조율기간을 늘려주고 싶어 연락하셨다고, 게다가 원래 계약 금액에서 20만 원이나 빼 주고 싶다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일사천리로 딸아이 맘에 드는 피아노를 찾은 것도 행복한데, 생각지도 못한 이런 행운이 생기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아이는 지난달 기말 시험을 앞두고 1주일간 피아노를 쉬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피아노를 가는 날 "아 나의 그리운 피아노!"하며 집을 나섰다. 평소와 달리 만화주인공 같은 아이의 말투가 재미있어 피아노가 그리 좋으냐 물으니, 돌아오는 아이의 답. 피아노는 쳐도 쳐도 계속 재미있고, 학원에 있는 동생들도 자신을 선생님처럼 우러러(?) 보는 모습이 귀여워서 좋다고 했다.

한창 '국·영·수'에 집중할 시기 아직 피아노학원에 드나드는 딸아이를 보며 주변에선 때로 우려 섞인 조언을 한다. 피아노를 계속 전공할 것도 아닌데, 이제는 정말 피아노를 끊고 공부를 하는 학원에 집중해야 할 때 아니냐고. 그런 말을 들으면 엄마인 나 역시 살짝 조바심이 나는 건 사실이지만, 아이 인생에 저렇게 좋은 거 하나쯤 있다는 게 엄청난 복이 아닐까 싶어 일단은 흐린 눈을 한다.

이제 며칠 있으면 우리 집에 그 복이 와 매일 함께할 것이다. 이 묵직하고 아름다운 피아노가 가끔은 공부에 숨 막히고 엄마 잔소리에 힘겹고 친구문제로 삐걱이기도 할 우리 딸아이에게 시원한 숨구멍으로, 평생 친구로 남아주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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