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셋에 안정된 생활 포기하고 한국 떠난 까닭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4. 8. 17.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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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외전] 조선귀족이었던 김가진의 대변신... 죽기 전까지 임시정부서 항일투쟁

[김종성 기자]

 동농 김가진
ⓒ 위키미디어 공용
일본은 대한제국을 병합한 1910년 8월 29일 조선귀족령을 공포하고 76명을 조선귀족으로 선정한 뒤 10월 7일 작위 수여식을 열었다. 조선시대의 귀족이 아니라 '조선귀족'이다. 식민지 조선의 새로운 특수계급인 조선귀족을 창설한 이 조치에 관해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3-1권은 이렇게 설명한다.

"일본이 이 특수계급을 만드는 것은 오키나와·타이완과는 다른 조건과 다른 식민지 경로를 가진 조선에서 식민통치를 시행하는 데 기존의 지배계급을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측면에서 체제 내로 포섭하고, 조선귀족에 서작(敍爵)된 인물들의 협력을 바탕으로 식민지배 초기에 직면하게 될 적잖은 정치적 부담과 저항을 다소나마 완화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조선귀족으로 선정된 76명은 한국 병합에 결정적 조력을 제공했거나 아니면 대한제국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데도 일본의 침략을 적극 막지 않은 사람들이다. 일본은 이들을 일본귀족(화족)이 아닌 조선귀족으로 우대하면서 '잘 부탁합니다'라는 뜻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이들에게 현재 가치로 5억에서 830억 원 정도 되는 국채증서인 은사공채를 수여하고 연리 5% 이자수령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76명 전원이 작위를 수령한 것은 아니다. 공족(公族)과 후작·백작·자작에 이어 최하위인 남작으로 선정된 김석진·민영달·유길준·윤용구·조경호·조정구·한규설·홍순형은 거절했다. 김석진의 경우에는 1910년 9월 8일 아편을 먹고 자결하는 방법으로 조만간 부여될 작위를 거부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작위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들은 핵심 친일파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들 중 하나였던 동농 김가진은 죽기 3년 전에 맹렬한 독립운동가로 변신해 일본을 당황하게 했다. 3·1운동 직후에 일어난 조선귀족 김가진의 독립운동 투신은 일본인들이 볼 때는 만세시위에 버금가는 충격이었다.

73세에 각성해 독립운동가가 된 김가진

김가진은 정조의 증손자인 헌종이 임금일 때인 1846년에 세도가문인 안동 김씨 문중의 서얼로 출생했다. 31세 때인 1877년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됐다가 40세 때인 1886년 과거시험 문과에 급제한 그는 대외관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주차일본공사관 참찬관, 주일본판사대신, 외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그는 이른바 개화정책으로 불리는 시장개방정책을 주도하고, 청나라 개혁운동인 양무운동을 시찰했다. 또 임오군란(1882)을 진압해 주겠다며 군대를 보낸 청나라가 내정간섭을 하는 상황을 타개하고자 조선·러시아 밀약 체결을 추진했다. 이 일이 발각돼 친청파 정권하에서 유배형을 살았다.

조러밀약 시도는 남진하는 러시아와 저지하는 영국의 패권경쟁 속에서 조선의 고종이 뜻밖에도 러시아 편을 든 세계적인 빅뉴스였다. 이런 사건에도 관련됐으니 김가진은 구한말 조선 외교의 최일선에 있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간섭이 절정을 이룬 시기에 내각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동학혁명 진압을 빌미로 군대를 파견한 뒤에 이 땅에서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동학군을 진압한 일본이 이른바 갑오개혁(갑오경장)을 벌이던 시기에 그는 농상공부대신의 직책을 수행했다.

2023년에 <석당논총> 제85집에 실린 이규수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교수의 논문 '제국 일본의 동농 김가진 인식'은 "김가진은 의욕적으로 갑오개혁을 추진했다"고 평한다. 이른바 갑오개혁은 긍정적 측면도 있었지만, 일본의 침략이 용이한 방향으로 조선의 시스템을 바꾸는 친일적 제도 개편이었다. 이런 일에 김가진이 앞장섰던 것이다.

위 논문은 1894년 3월 31일 자 <아사히신문>이 조선 정계의 파벌 구도를 소개하면서 "친일당으로는 박정양·김가진·이학규·김사철"을 거명했다고 보도했다. 논문은 이 시기의 일본 보도들을 종합해 "그중에서도 일본이 주목한 중요 개혁당은 김가진·조희연·권영진·유길준·김학익·안경수였다"고 정리한다. 세도가문 출신의 외교관이라는 점 때문에도 주목했겠지만, 일본이 주목한 것에는 그의 개인 역량도 있었다. 위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요미우리신문>은 김가진을 '박학 기재 겸비'의 인물이자 '신조선의 삼걸'로 주목해 초상화를 게재하면서, 조선의 정계를 좌우할 '사물을 널리 분별하여 변론하는 박변(博辯)의 독립개화당의 한 사람'으로 주목했다."

이런 평가를 받은 김가진은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을 계기로 일본을 반대하는 인물로 부각됐다. 그는 늑약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시할 뿐 아니라 그것을 행동으로도 옮겼다.

며느리인 독립운동가 정정화의 회고록 <장강일기>에는 "시아버님은 그때 모든 관직을 사퇴하였으며 민 충정공과 함께 자결을 상의하였으나 눈치챈 가족의 감시로 좌절되었다"고 설명돼 있다. 을사늑약 순국의 대명사인 민영환과 함께 결행을 하려다가 가족들의 제지를 받았던 것이다.

안보협력 파트너로 여겼던 일본이 외교권을 빼앗는 뜻밖의 상황을 목도하면서 김가진은 일본에 등을 돌렸다. 하지만 일본은 그를 조선귀족 남작으로 선정했다. 을사늑약 전에 그가 보여준 모습에 대한 일본의 평가가 그때까지도 유효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명문가 출신으로서 한때 일본과 보조를 맞췄다는 점이 고려됐으리라 볼 수 있다. 위 이규수 논문은 "김가진의 경우는 친일보다는 주일공사의 경력과 1품관이었다는 점이 수작의 대상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는 관점을 밝혔다.

친일파인 일진회 이용구는 이완용 못지않게 일본을 도왔지만 조선귀족이 되지 못했다. 농민의 아들이고 동학교도 출신인 이용구는 김가진보다 훨씬 많은 친일을 했지만, 누구를 표창하는 게 식민지배에 더 유리한가 하는 기준에서 김가진에게 밀린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일본이 어떤 이유로 작위를 줬든 간에, 을사늑약 이후에 반일을 했든 안 했든 간에 김가진이 조선귀족 작위를 곧바로 거절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신의 경력과 가문을 식민지배에 이용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그냥 받아들인 셈이다. 그는 은사공채 형식으로 지급되는 연금은 거절했다. 이것을 보면 조선귀족 작위가 탐탁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거절할 마음까지는 내지 못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랬던 그가 사망 3년 전에 3·1운동을 목격하면서 확 달라졌다. <장강일기>는 "3·1독립선언은 물론 시아버지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으며, 비록 74세의 노령이었으나 나라를 위하여 무엇인가 기여하고 싶은 결의를 갖게 했던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만 73세에 각성한 김가진은 37세에 각성한 사람보다 훨씬 열정적이 됐다. 그때까지의 삶을 훌훌 털고 독립운동가로 나선 그는 무장 독립투쟁이라는 가장 강력한 방식을 선택했다. 이규수 논문은 "김가진은 대동단 총재가 되어 국외로 탈출했다"고 한 뒤 이렇게 기술한다.

"김가진은 '노예적 생활을 보내기보다 독립군의 깃발 아래 깨끗이 죽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관헌 측에서도 김가진의 동정을 감시하면서 '김가진=대동단의 두령, 대동단=대한민국임시정부의 별동대'로 파악했다. 김가진은 이후에도 '일본과의 혈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기고문을 작성했고, 이를 위한 군자금 모집과 조선 내 지부 설립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절절한 김가진의 독립운동,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는 이유
 지난 7월 23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열린 동농 김가진 서예전 '백운서경' 전시 기자 간담회에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이 전시는 9월 19일까지 열린다.
ⓒ 연합뉴스
김가진의 무장투쟁 준비는 일본 군대에 타격을 주는 단계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이 대일 전쟁을 결심하고 준비하도록 독려하는 결과는 낳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이상하게 비쳐지기보다는 큰 감동으로 다가갔다. 웬만한 사람은 성에 차지 않는 꼿꼿한 독립운동의 대명사인 심산 김창숙의 평가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김창숙은 1951년경에 쓴 자서전인 <벽옹 73년 회상기>에서 3·1운동 직전에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서를 쓴 이승만을 "우리 광복운동사상에 큰 치욕"으로 비판한 직후, 김가진과 임시정부 핵심 인물들에 대한 외국 저명인사의 평가를 이렇게 소개했다.

"내가 귀국 정부의 인물들을 보니 참으로 초조하지 않습니다. 팔십 노혁명가인 김가진 선생은 더구나 공경할 만한 분입디다."

'혁명가'는 '독립운동가'를 높여 부르는 표현 중 하나였다. 다른 사람의 말을 전달하는 형식이기는 하지만 김창숙은 김가진을 혁명가로 지칭했다. '김가진의 과거'보다는 '김가진의 현재'가 훨씬 강렬하게 인식됐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김구도 <백범일지>에서 3·1운동 직후의 김가진을 선생으로 지칭했다. "김가진 선생이 3·1선언 후에 왜에게 받았던 남작을 버리고 대동당을 조직하여 활동"했다고 김구는 말했다.

여차하면 본인이 무기를 들거나 아니면 청년들(이봉창·윤봉길)에게 무기를 쥐어주는 김구였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인물은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런 김구의 눈에도 '73세까지의 김가진'보다는 '73세 이후의 김가진'이 훨씬 강한 인상을 주었다. 김가진의 진심과 애국심이 김창숙과 김구에게 감동적으로 전달됐던 것이다. 그의 독립운동 투신이 독립운동진영에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김가진은 연금은 수령하지 않았다지만 조선귀족 작위를 곧바로 거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인생 막판 3년간의 절절한 독립운동이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독립운동가였던 그가 대한민국정부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못하는 결정적 사유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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