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호랑이 세 자매
나의 아버지는 하루라도 빨리 결혼할 것을 당신의 딸들에게 강요했다. 그러나 우리 세 자매는 결혼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없었다. 아버지와의 길고도 지루한 싸움의 결과만 공개하자면 큰언니는 이혼, 작은언니는 기혼, 막내인 나는 미혼이다. 큰언니가 돌아온 싱글이 된 이후 무언의 휴전 협약이 맺어졌다고 생각했으나 아버지는 이따금 기습 공격을 가해 온다. 미혼인 나에게는 결혼을, 이혼한 큰언니에게는 재혼을 하라고 말이다. 언제나 지아비 편에 서는 어머니마저 “아유, 됐으니까 그만 좀 해요!” 하며 역정을 내지만 그럼에도 아버지는 당신의 주장을 굽힐 줄 모른다. “남들처럼 사는 게 좋은 거여!”
이미 남들처럼 살아본 큰언니는 그런 아버지의 말에 콧방귀를 뀐다. 하지만 아직 그래보지 못한 나는 반신반의 상태다. 하희라를 마님처럼 여기는 최수종을 보면 ‘나를 떠받들어 주는 사람을 만나 마음 편히 살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무송을 꼭 한번 때려 주고 싶다는 노사연의 농반진반을 듣고 있노라면 ‘배우자의 허물마저 포용할 인내심이 내게 과연 있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고민에 종지부를 찍는 방법은 결혼뿐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무작정 덤비기에는 너무나 큰 위험이 따른다. 결혼해서 고생하는 여자는 있어도 결혼 안 해서 고생하는 여자는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짝을 이루어 살아가는 삶에 대한 로망과 의심을 골고루 품은 채 독수공방하며 지내던 어느 날, 요가원에서 뜻밖의 결혼 장려 장면을 목격했다. 우리 요가원은 백년가약을 맺기로 약속한 연인이 함께 운영하고 있다. 조용하고 따스하며 사려 깊은 두 사람이 이끄는 요가원에는 언제나 은은한 평화가 감돈다. 그런 요가원에 위기 아닌 위기가 찾아왔다. 수련이 진행된 지 10분쯤 됐을 무렵, 그러니까 각자가 스스로의 세계에 몰두하려는 찰나, 수강생 하나가 헐레벌떡 문을 열고 들어와 “쫙!” 소리를 내며 요가 매트를 펼쳤다. “쉬이이익, 흐으읍, 쉬이이익, 흐으읍.”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그이의 콧바람에 잔잔하던 나의 마음이 일렁였다.
수련을 마친 후 요가원을 나서려는 그이를 붙잡고 남자 선생님이 부드럽게 주의를 줬다. 다른 분들에게 방해가 될 수 있기에 지각 입실을 금하고 있다고 말이다. 평소 싫은 소리라곤 일절 하지 않는 선생님이었기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죄송하다는 말이 아무래도 어려웠는지 그이는 몰랐다는 말로 잘못을 회피했다. 그러자 여자 선생님이 힘을 보탰다. 안내문에 공지가 돼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이는 문이 잠겨 있지 않아서 들어가도 되는 줄 알았다며 반격을 가했다. 남자 선생님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굳이 문을 잠가놓지는 않으니 이러한 상황이 또다시 발생할 경우 유의해 주시길 바란다고 말이다.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서서 만만찮은 상대에게 맞서는 선생님들의 모습은, 언젠가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본 미어캣 무리와 코브라의 사투를 떠올리게 했다. 미어캣 한 마리가 고개를 바짝 세운 코브라와 대치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뒤늦게 알아챈 다른 미어캣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코브라를 둘러쌌다. 미어캣들은 코브라와의 거리를 좁혀가며 압박을 가하더니 자그마한 손톱과 이빨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일대일로 맞설 적에는 꼼짝도 하지 않던 코브라였지만 똘똘 뭉친 미어캣 무리 앞에서는 맥을 추리지 못했다. 선생님들에게 한참을 대항하던 그이 역시 결국에는 고개를 숙였다. “척박한 사막에서 살아남는 비결은 협력”이라던 성우의 내레이션이 그 모습 위로 겹쳐 들리는 듯했다.
“안녕히 계세요” 하는 나의 말에 카운터에 앉아 있던 선생님들이 미어캣처럼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그런 그들을 뒤로한 채 요가원을 나섰다. 수풀처럼 무성하게 솟은 아파트 사이를 어슬렁어슬렁 걸으며 생각했다. 아버지가 나에게 결혼을 강요하는 이유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거라고. 남들처럼 무리 지어 살아가며 만만치 않은 세상 속에서 살아남으라고. 기죽지 말라고. 행복해지라고. 하지만 아버지, 염려 마세요. 쇼윈도에 비친 제 모습은 호랑이처럼 우람하기만 한걸요. 일흔이 넘도록 성질이 죽지 않는 당신의 딸답게 쓸데없이 기백이 넘치는걸요. 당신의 큰딸이 무리에서 이탈해 홀로 살아가는 데에는, 당신의 작은 사위가 제 부인을 ‘호랑이 마누라’라고 부르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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