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만에 마주친 옛 연인이 말했다, 나를 잊은 적 없다고

김상목 2024. 8. 16.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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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비포 선셋>

[김상목 기자]

 영화 <비포 선셋> 스틸
ⓒ 에무필름즈
<비포 선라이즈>를 본 이들이 <비포 선셋>에 도전한다면, 절대적 관심사는 우선 전작의 후일담일 것이다. 1994년 여름, 유럽 횡단 열차 안에서 우연히 같은 칸에 앉게 된 23살 청춘남녀 제시와 셀린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내려 하루를 보낸다. 일생에 드문 인연이라는 것을 깨달은 둘은 6개월 후 빈 기차역 정거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아쉬운 이별을 갖는다. 둘은 과연 반년 후 재회했을까? 누구나 궁금할 일이다.

첫 만남에 반한 두 사람, 9년 후

그로부터 9년이 흘렀다. 파리의 어느 서점 안, 시간의 흐름을 반영하듯 예전 모습에서 주름이 제법 생긴 제시가 앉아 있다. 그는 제법 인기를 얻은 소설의 작가로 출판기념회를 진행 중이다. 그 소설의 내용은 9년 전 빈에서의 기억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기자들은 그들의 만남이 이후에 어떻게 이어졌는지 집요하게 추궁하지만, 제시는 설렁설렁 선문답으로 말끝을 흐린다.

행사가 끝으로 향하던 중 무심코 서점 안을 돌아보던 제시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진다. 셀린이 서점 한구석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다. 그렇게 9년 만의 재회가 시작된다. 그들이 처음 우연히 만난 것처럼 운명적으로.

둘은 마치 몇 달 만에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움을 나누지만, 애석하게도 빈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간은 제한돼 있다. 제시는 두시간여 지나면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뜻밖의 만남을 그저 인사만 나누고 헤어지기엔 너무 아깝다. 둘은 서로 나누고 확인하고픈 사연이 무척 많다. 이것저것 시간 계산을 한 끝에 제시는 커피 한 잔은 할 수 있겠다며 빠듯한 일정을 쪼개 둘만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확보한다. 각자에게 쏟아지는 질문 공세와 함께 둘은 유쾌하면서도 아련한 수다를 개시한다.

처음엔 그저 커피 한 잔만, 했던 게 두 사람 다 미련이 남는다. 둘은 카페를 나와 느닷없이 센 강 유람선에 올라탄다. 관광객이나 타는 거라며 난감해하던 셀린은 막상 타고 나니 풍경이 새롭다며 즐거워한다.

투어가 끝나고 그들이 내린 선착장에는 제시를 공항으로 실어갈 차가 대기하고 있다. 그들은 아직 헤어지기 아쉽다. 셀린을 태워준다는 핑계로 제시는 빙 돌아 그녀의 집으로 향한다. 이제는 노래 한 곡 들려달라며 기어코 셀린의 아파트에 진입하는 도전에 성공한다. 이제 정말 시간이 빠듯하지만 말이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영화 <비포 선셋> 스틸
ⓒ 에무필름즈
드디어 모두가 궁금해하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두 사람은 6개월 후에 재회하지 못했다. 한 사람은 약속했던 시간과 장소에 도착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그곳에 당도하지 못했다. 한 사람은 며칠을 빈에서 방황하다 떠났고, 그들은 9년 만에 파리에서 우연한 재회에 이른 것이다. 요즘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들은 휴대전화는 물론 전자메일도 아직 대중적으로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에 만난 사이다. 따로 집 전화번호라도 교환하지 않았으니 연락할 길이 없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는 그렇게 살았었다.

두 사람의 재회는 우연히, 하지만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제시는 자신이 둘만의 비밀을 소재로 소설을 쓰게 된 데는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투영됐다고 고백한다. 둘은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지만, 서로를 잊은 적이 한순간도 없다며 간증 아닌 간증을 주고받는다. 그들은 우리가 빈에서 6개월 후 만났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으로 갑론을박을 이어간다. 관객도 무척 궁금한 대목이다.

그들은 짧은 시간을 안타까워하며 끝이 없을 것만 같은 대화를 이어간다. 6개월 후의 상황을 정리한 다음에는 역시 '근황 토크' 순서다. 제시는 결혼해 아내와 아들이 있다. 소설이 성공한 덕분에 촉망받는 신예 작가로 등단도 성공했다. 셀린은 환경운동 단체에서 활약 중이다. 그들의 이후 행보는 <비포 선라이즈>에서 두 사람이 보여줬던, 확연히 구분되는 세상에 관한 시각과 태도를 고스란히 계승한 모양새다.

여전히 적당하게 냉소적이고 그러면서도 철학적 사유를 이어가는 제시, 세상의 여러 복잡한 모순을 바꾸려는 의지와 함께 내면의 공허함을 간직한 셀린의 차이는 툭 하면 티키타카로 논쟁을 벌이게 만든다. 달달 커플의 닭살 사이로 더 나빠진 세상을 향한 우려가 묵직하게 균형을 맞춘다. 딱 한 번 만났던 둘의 하루는 그렇게 일생의 인연이 된 것이다.

서로 합이 척척 맞는 덕분에 9년 동안 떨어져 있어도, 잊지 못한 그들의 회한은 더 치명적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만약에?'라는 질문을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던진다. 이미 시간은 흘러가 버렸고, 둘은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 상황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래서 화가 치밀어오른다.

덤덤하게 속으로 삭이는 제시에 비해서 셀린은 그 상황이 용납되지 않는다. 더 잘 될 수 있었는데, 조금만 타이밍이 맞았다면 이랬을 텐데 하는 상상은 한 번 점화되면 꺼질 줄을 모르고 타오르게 마련이다. 그렇게 그들은 기억을 일일이 대조해가며 되짚고, 멈추지 않는 가설을 풀어나간다. 어느새 관객은 옆자리 커플의 만담을 지켜보는 관전자가 된 지 오래다.

영화는 80분 동안 유쾌와 뭉클을 쉴 새 없이 교차하며 관객이 제시와 셀린의 대화를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눈과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든다. 누가 옆에서 대화 청음을 방해하면 짜증이 왈칵 날 정도로 몰입하던 관객은 그들의 시간이 예정된 일정 때문에 점점 쫓긴다는 기색이 느껴질 때마다 끼어들어 참견하고픈 이심전심을 겪고야 만다.

과연 9년 전의 시행착오를 이들은 되풀이하고 말 것인가. 지나간 시간의 모래시계를 다시 뒤엎으면 될 일 아닌가? 구경꾼이 아니라 응원단이 되어버리는 순간이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영화 <비포 선셋> 스틸
ⓒ 에무필름즈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은 그들이 재회한 파리의 풍광이다. 연작의 첫 번째 작업에서 오스트리아 빈의 배경이 인상적이었다면, 두 번째 작업에선 유럽의 수도라 해도 과언이 아닐 파리의 독특한 풍경이 별도의 등장인물인 것처럼 맹활약을 펼친다. 저렇게 매력 넘치고 운치있는 도시에서는 무슨 기적이라도 일어나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이를 영화는 시작부터 한참 동안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대신 카메라를 따라 관객의 시선을 이동시키며 풀어낸다.

시선이 도착한 자리는 출판기념회가 진행되는 서점이다. 파리의 서점은 뭔가 특별한 게 있을까? 눈썰미 있는 이들이라면 특별한 설명이 따라붙지 않더라도 이 곳이 어디인지 순식간에 알아차릴 테다. '셰익스피어 & 컴퍼니', 파리 여행객에겐 '성지순례'의 필수코스다. 헤밍웨이와 휘트먼이 단골이었고, 몇 번에 걸쳐 주인이 바뀌고 세상의 격동에 휩쓸리면서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존재하는 곳이다. 이곳을 소재로 한 책과 영화만 열 손가락을 꼽을 수 있는 명소의 아우라는 굳이 미술팀이 출동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거기에서 둘은 9년의 시차를 단숨에 극복하고 만다.

서점을 나온 그들은 파리 구시가의 고풍스러운 거리를 산책하며 길모퉁이 카페로 향한다. 관광객이라면 '세일 데이'에 상점가로 몰려들어 쇼핑에 분주할 테지만, '파리지앵' 셀린은 오히려 그런 인파를 피해 오붓한 시간을 누릴 방법을 꿰고 있다.

그들이 들어선 작은 카페는 '우리 동네에도 저런 곳 하나 있었으면!' 하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올 법한 꿈의 공간 그 자체다. 커피 한 잔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켜 보지만, 떨림은 멈출 리 없다. 둘만의 기억과 상상이 서점을 출발해 골목을 지나 카페로 내려앉는 기분이다.

굳이 야외 개막식을 강행할 정도로 파리라는 도시의 일부인 센 강을 항해하는 유람선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둘은 멈춰 있던 시간을 다시 바깥세상과 연결한다. 그러자 그저 몽상에 머물러 있던 둘 사이의 상황이 좀 더 명료해진다. 그리고 그들이 처한 조건을 알아가며 이제 둘은 각각 하지만 동일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다. 여전히 유머가 넘치고 친밀한 교감이 오가지만, 그들에겐 다시금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기에 속내는 복잡하다.

서서히 해가 저물어가는 센 강 유역과 수평선 너머로 보이는 파리의 상징물들을 보면서 둘은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예찬한다. 아주 훌륭한 관광 홍보영상이 아닐 수 없다. 이보다 더 잘 만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마침내 오래됐어도 운치 있는 셀린의 스튜디오형 아파트에 도착한 두 사람. 마치 숲속의 중세 성채가 연상되는 낡은 아파트 단지는 엘리베이터도 없고 차량 진입도 쉽지 않지만, 아파트 앞마당에선 이웃들의 파티가 열리고, 주민들은 정답게 인사를 나눈다. 에펠탑도 좋지만 이런 게 파리라는 화룡점정처럼 다가오는 장면이다.

소파에 편히 앉아 차를 대접받고 셀린의 자작곡을 즐겁게 감상하는 제시. 느긋한 위트 속에서도 시한폭탄 타이머처럼 관객도, 두 사람도 초조해지는 결정적 찰나가 온다.

이보다 더 멋드러질 수 없는 가교
 영화 <비포 선셋> 포스터
ⓒ 에무필름즈
성공한 영화가 시리즈가 되는 건 흔하다. 그것도 로맨스물이라면 관객은 더 영화 속 인물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마련이다. 마치 현실 지인의 연애를 보는 것처럼. 감독과 두 배우는 함께 각본을 쓰며 9년 만의 재회를 완성한다(그리고 9년 후 또 다른 재회를 그려낼 것이다). 셀린 역 줄리 델피는 직접 3개의 자작곡을 연주하고 노래한다. 그 노래는 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결정적 전환점에서 활약한 덕분에 쉽게 잊히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들에 자신들의 삶을 투영하게 된 관객의 긴장감은 셀린의 노래가 마칠 때쯤 극점에 달한다.

과연 제시는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 그 답을 확인하기까지 또 9년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개봉 당시 목 빠지게 기다리던 대신 (감질나기 좋게 편성된 재개봉 일정 덕에) 우리는 한 달 후면 그 결과를 목격할 수 있다. 물론 감흥의 무게감은 다를 수밖에 없지만 <비포 선셋>을 보고 나면 반드시 석양이 저문 후의 시간을 기다리게 될 테다. 틀림없는 일이다.

[작품정보]

비포 선셋 Before Sunset

2004 | 미국 | 로맨스/멜로

2024.08.14. (재)개봉 | 80분 | 15세 관람가

감독 리차드 링클레이터

출연 에단 호크(제시 역), 줄리 델피(셀린 역)

각본 리처드 링클레이터, 에단 호크, 줄리 델피

수입/배급 에무필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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