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에 새긴 "일본 망해라", 누가 썼을까 [복작복작 순창 사람들]

최육상 2024. 8. 16.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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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절 김영태씨가 작성한 전북 순창군 쌍치면 '망일대'... "대단한 기개, 이제라도 알려져야"

[최육상 기자]

 암벽에 새겨진 '망일대'-일본이 망하길 바란다
ⓒ 최육상
전북 순창군 쌍치면 오봉리산 11번지 8부 능선에 자리한 암벽에는 '兦日坮(망일대)'라는 한자 세 글자가 가로로 새겨져 있다.

'망'자는 '망할 망(亡)'자는 아니지만 일제식민지 단속을 피하기 위해 같은 의미의 망(兦)자를 새겨넣은 것으로 "일본이 망하길 바란다"는 의미다. '망일대'를 정면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 아래에는 '大韓老人(대한노인)', 왼쪽 아래에는 '자 용원, 두, 덕, 장, 근, 한'이라는 자손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망일대'에 오르는 길

'망일대'를 연구하며 '쌍치면 항일유적지 망일대(兦日坮) 소고(小考)'라는 논문을 집필하기도 한 정현창 문화재학 박사 등을 지난 11일 일요일 오전 7시 무렵 순창군 순창읍에서 만나 쌍치면 망일대로 향했다.

순창군 쌍치면과 정읍시 산내면 접경 지역 55번 국도 옆에 차를 세웠다. 망일대 글자가 새겨진 암벽은 도로에서 보였지만, 암벽으로 향하는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일요일 새벽 전남 화순에서 순창을 찾은 정 박사 일행과 순창군 순창읍, 쌍치면에서 합류한 순창군민 8명 중에서 다수는 육십이 넘은 나이였다. 이들의 문화유산을 향한 열정은 젊은이 못지않았다. 일행은 정글을 탐험하듯 우거진 숲을 헤집어 길을 만들며 어렵게 암벽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망일대'가 새겨진 암벽 앞까지 가기 위해서는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우거진 수풀을 헤치며 길을 내야 했다.
ⓒ 최육상
<광산김씨 족보>와 김영태 부인의 사망 후 기록인 <숙부인진주강씨묘갈명>(1926), <호남지>(1935) 등 정 박사가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암벽에 '망일대'를 새긴 '대한노인'은 김영태를 칭한다.

김영태는 철종 7년(1856년) 9월 17일 출생해 일제강점기인 1936년 이승의 삶을 마쳤다. 김영태는 쌍치면 국사봉 남쪽 매봉(鷹峯) 수절(數節) 아래에 영원히 누워서도 일본이 있는 동남쪽을 바라보며 일본이 망하기를 빌었다.

이날 정 박사와는 2022년 6월 이후 두 번째 만남이었다. 첫 만남에서 정 박사와 동행했던 김인중(김영태 증손자)씨도 함께 자리했다.

정 박사는 "2021년인가 선배님(김인중)이 '망일대' 이야기를 꺼내셔서 어렵게 현장을 찾아내 암벽에 새겨진 한자들을 확인했다"면서 "자료를 찾아보니까 다행히 기록이 남아 있어서 연구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3년 전에도 어렵게 암벽에 올랐었는데, 아무도 관리를 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수풀이 우거져 방치돼 있다"면서 "전북 순창군에서 문화유산으로 지정해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정자는 없어지고 글자만 남아

정 박사가 확인한 자료에 의하면, 암벽에 남아 있는 망일대는 사실 누정 이름이었다. 현재 정자(亭子) 망일대는 없어지고 망일대 글자만 남아 있다. <호남지> 순창군 누정조에 '대한노인 김영태'의 망일대가 수록되어 있다. 1932년 순창 유림들이 호남지간소에 보낸 '통문' 등 여러 자료에도 '망일대'를 세웠음을 기록하고 있다.

망일대 정자를 세운 시기는 경술국치(1910) 후에 낙향하였고, <숙부인진주강씨묘갈명>(1926)의 기록에 망일대가 있는 것으로 보아 1911~1925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 박사는 논문에서 김영태의 행적에 대한 객관적인 중요한 사료들을 설명했다.

"<호남지> 충의조에 '정미년 사실'과 '병오창의 사실' 등 '왜적을 물리치려다 이루지 못하였다'라는 구체적인 사실이 있는데, 전라도의 신중한 검증에 의한 결과로 판단된다. 정미년(1907) 고종 강제 퇴위와 관련하여 아마 '13도 창의병' 의거에도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당시 일제는 각 지방의 영향력이 있는 인사들을 헌병주재소로 불러서 거액의 은사금을 내린다거나 기타 여러 방법으로 회유하거나 협박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의지를 꺾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김영태는 왜적 토벌을 위하여 의거를 계획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제에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어 살아 돌아왔다는 기록의 사실성이 높아졌다."
 ‘망일대’(파란상자)를 정면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 아래(초록상자)에는 ‘大韓老人(대한노인)’, 왼쪽 아래(빨간상자)에는 ‘자 용원, 두, 덕, 장, 근, 한’이라는 자손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최육상
정 박사는 "일제강점기 시절 대놓고 '일본이 망하길 바란다'라는 글자를 새기고, 자신은 일본신민이 아니라 '대한(제국)노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개, 그리고 자손들 이름까지 새겨넣어 항일 정신을 이어가도록 한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면서 "더욱이 김용태의 큰아들 봉수와 암벽에 새겨진 손자 용원, 증손 인중 등은 모두 '쌍치면 금성리 286번지'가 원적인데, 원적지(김영태 집)에서 불과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당시 일본 금성 헌병주재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3대가 견딘 가혹한 일제강점기

1900년대를 전후한 대한제국 시기는 나라가 무너져 가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대한노인 김영태와 아들 김봉수, 손자 김용원은 쌍치면에서 그 가혹한 일제강점기의 세월을 견뎌냈다.

당시 '망일대', '퇴은정', '쌍구정' 등 정자 3곳은 쌍치면 오봉리와 피노리 일대에 세워졌다. 이에 대해 정 박사는 "조부 김영태부터 손자까지 3대가 국난에 통곡하며 정자를 세우고, 대한인의 긍지를 지니고 일제가 망할 날만을 학수고대하면서 무도한 세상일을 아니 듣고자 세상 욕망을 버리고 은둔하여 지냈다"고 해석했다.
 '광산김씨 족보'에서 확인한 영태, 망일대, 용원 기록.
ⓒ 최육상
이 시절 김영태가 지었던 유일무이한 시는 망국의 한을 달래며 우국충정을 잘 드러내 준다.

나라는 없어지고 이 몸만 늙어가네
일편단심 붉은 마음 속이기 어려워라
흰구름 물 위에 비추어 흘러만 가네
낚시질만 일삼는다고 그 누가 말라 하랴.
(國破人當老/難欺一片心/白雲流水上/釣字有誰禁)

일본 땅 향해 새긴 우국충정의 마음

정 박사는 답사 현장에서 일행에게 "망일대 글자가 새겨진 암벽은 정확히 일본땅을 바라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나침반을 확인하니 암벽이 바라보는 곳은 정동남 방향으로 일본이 맞았다. 정 박사는 논문에서 대한노인 김영태가 살던 시대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대한노인이 활동한 일제강점기 1910년에서 1936년 당시는 강력한 무력탄압을 동원한 일본-대한제국 일체화 시기였기 때문에 '망일'이라는 말을 뛰어넘어 감히 글자로 새길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자가 있었을까? 더군다나 조선 민족 고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혼과 피의 일체를 강요하던 그 당시에 감히 '대한노인'이라는 말을 드러내놓을 수 있는 용기를 그 누가 가졌겠는가 말이다. 김영태 이전이나 이후에도 이 땅에는 망일대(望日臺)는 있어도 망일대(亡日臺)는 없다. 단지 순창의 '망일대(兦日坮)만 홀로 외로이 존재할 뿐이다."
 전남 화순에서 순창을 찾은 정현창 박사 일행과 순창군 순창읍, 쌍치면에서 합류한 순창군민 8명 중에서 다수는 육십이 넘은 나이였다. 쌍치면 쌍구정 앞에서 정현창 박사가 관련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 최육상
답사를 마친 일행은 "일제강점기 항일 정신을 강조한 김영태 선생의 기록이 100여년 만에 확인된 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면서 "현재 윤석열 정부가 친일매국 행위를 자행하고 있는데, 대한노인 김영태 선생의 100여년 전 항일정신이 이제라도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 박사는 끝으로 "현재 김영태 선생의 자료를 계속 모으고 있다"면서 "순창군도 순창 지역에서 독립 유공에 헌신하신 분들을 한 분이라도 더 찾아내 순국선열의 피맺힌 혼을 달래드리는 일을 계속 진행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어 "자랑스러운 역사문화유산을 후손에게 올바르게 전해서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열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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