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범죄, 속수무책 정부 [강주안의 시시각각]

강주안 2024. 8. 16.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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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안 논설위원

정부 정책이 더딘 건 익숙한 일이다. 그래도 급증하는 신종 보이스피싱 사기에 대한 경찰과 금융 당국의 무기력한 대응은 도를 지나친다.
얼마 전 정년을 맞은 A씨는 노후 자금으로 모은 17억원을 사기단에 털렸다. 재테크 책 저자의 유튜브 관련 채널을 구독한 뒤 받은 e메일 안내에 따랐다가 벌어진 일이다. A씨가 투자금을 보내자 일당은 바로 잠적했다. 여러 명이 한 명을 속이는 보이스피싱 수법이었다. 보이스피싱 피해자는 사기 계좌의 지급 정지를 신청할 수 있다. 금융감독원과 경찰청이 ‘보이스피싱 피해를 보았다면 즉시 112를 통해 사기범 계좌를 지급정지하라'고 발표한 게 13년 전이다.
A씨는 112로 지급 정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내용을 들은 직원은 “보이스피싱이 아니고 투자 사기 관련이라 실시간 지급 정지가 어려울 수 있다”며 경찰서 민원실로 가라고 했다. 거액 인출을 막아보려는 기대가 꺾였다. 수사를 맡은 대전경찰청은 범인 검거도, 피해금 회수도 못 한 상황이다. 지난 13일 오후 재테크 책을 펴낸 출판사를 찾아가 직원이 나타나길 기다린 끝에 저자와 통화가 이뤄졌다. 그는 “A씨가 당한 일과 무관하다”며 “나를 사칭한 범죄 같다”고 했다.


신종 보이스피싱 사기 피해 속출


사기 계좌의 지급 정지 거절 사례는 이뿐이 아니다. 재택근무자 모집 문자를 보낸 뒤 주부를 타깃으로 돈을 가로채는 부업 사기가 대표적이다. 대출 희망자를 속여 사기 계좌로 악용하는 수법도 전형적인 보이스피싱이다. 접속 기록은 해외로 연결된다. 그런데도 지급 정지를 거절한다. 금융권 담당자에게 묻자 “지급 정지 사유는 정부 기관 사칭과 대출 사기의 두 가지로 정해 놨다”며 “문의한 사례는 투자 사기와 취업 사기라 해당이 안 되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경찰·은행 “계좌 지급 정지 안 돼”


생각할수록 황당하다. 이 정책은 보이스피싱 조직이 우리 정부 방침을 잘 따라야만 유효하다. 반드시 검찰·금감원을 사칭하거나 대출 사기로만 낚아야 한다. 최근 피해가 속출하는 ‘쇼핑몰 사칭’이나 A씨가 당한 ‘금융투자사 사칭’은 수법이 같아도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다. 범죄 조직엔 식은 죽 먹기다. 그들의 진화는 피해자 모임 회원 수가 말해준다. 지난해 7월 80명 정도였던 한 카톡방 피해자는 1년 새 5배 넘게 늘었다. 모임을 주도하는 어린이집 원장 임모씨는 “730명 넘게 가입했다가 일부가 나가 현재 참여자는 490명 정도”라고 말했다.
2011년 금융감독원과 경찰청의 공동 보도자료. 보이스피싱 피해자에게 지급정지를 신속히 요청하라고 안내한다.
이런 범죄가 보이스피싱과 밀접하다는 사실은 정부 자료에도 나온다. 국무조정실은 지난 2월 보이스피싱 대책을 발표하면서 ‘투자리딩방’ ‘구매대행 아르바이트 사기’를 거론했다. 3억원의 부업 사기를 당한 30대 회사원은 “수사 경찰이 며칠 전 범인 한 명을 잡았는데 보이스피싱 일당이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지급 정지만 해도 피해를 크게 줄인다는 게 금감원 자료다. 지난해 피해 금액 1965억원 중 652억원을 지급 정지 등을 통해 피해자에게 돌려줬다. “요즘 고철 구매 빙자 등으로까지 보이스피싱이 진화했다. 피해자를 보호하는 실효성 있는 대책이 시급하다”(김천지청장 출신 박진영 변호사)는 주문이 나온다.

범죄자 이익 늘리는 경직된 정책


허술한 지급 정지 제도는 2차 범죄를 부른다. 금감원은 올 초 자영업자에게 고의로 소액을 입금한 뒤 보이스피싱 당했다고 신고해 계좌를 정지시키고는 이를 풀어주는 대가로 돈을 뜯는 범죄를 공개했다. 정작 피해자는 거절당하는 지급 정지 요청을 범죄자들은 허위로 하고 있다는 얘기다. 부업 사기 피해자에게 접근해 “사기 계좌를 정지시켜 주겠다”며 2차 피해를 주는 일까지 벌어진다. 어렵게 모은 1억여원을 뜯긴 50대 주부는 지급 정지 방법이 있다는 말에 혹해 보이스피싱으로 신고했다가 도리어 ‘허위 신고’ 수사를 받기도 했다. 그가 수사기관에 제출한 반성문의 일부는 이렇다.
‘부업 사기에 당하게 됐습니다. 원금을 찾고 싶은 마음이 커서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생각도 안 났습니다. 사기를 당하는 이 무지함을 가엾게 봐주시고 선처 부탁드립니다.’

강주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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