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곤의 퍼스펙티브] ‘극장국가’ 북한의 끝나 가는 낡은 영화 상영
북한 ‘김주애 후계 구도’ 성공 가능성은
■
「 와다 하루키 “북한은 극장국가”
백두혈통이 기획·연출·주연
수령 향한 절대성·핵무력 중시
총대철학, 김주애가 대변 못해
기존 방식으론 주민 통제 한계
해법은 핵 포기와 경제 살리기
」
백두혈통으로 불리는 김일성 일가가 연출해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의 주제는 ‘총대철학’으로 상징화된 김일성의 빨치산 이야기이다. 과장된 부분이 있지만, 김일성이 만주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상대로 싸운 것은 맞다. 보천보 전투는 과장을 통한 신화 만들기의 대표적인 사례다. 김일성과 박달 등이 이끈 항일 세력이 1937년 6월 4일 함경남도 보천면(현재는 양강도)에 있는 일본 주재소 등 관공서를 공격해 일본 국적의 민간인 2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이들은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등 포고문과 격문을 살포하고 순식간에 철수했다.
두 자루의 권총에서 시작된 총대철학
북한은 보천보 전투를 태평양 전쟁 전황을 바꿀 정도로 일본 제국주의에 결정적 타격을 준 전투라고 선전한다. 북한은 이를 기막힌 총대철학 서사로 만들어 현재도 기념비적 사건으로 삼고 있다. 북한 주장에 따르면 김일성이 14세 때인 1926년 6월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두 자루의 권총과 함께 “민중이 총칼을 들고 일어나 제국주의와 싸워 나라를 찾고 착취와 압박이 없는 새 세상을 세워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일성은 이 유언에 따라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위한 혁명 각오를 다진 이래 빨치산 투쟁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쳤고, 조국해방전쟁(6·25 전쟁)에서 미 제국주의에 승리를 거뒀다는 게 북한의 논리다. 북한은 지금도 이를 선전한다. 지난해 2월 8일 이른바 ‘건군절’ 75주년 열병식에서 빨치산을 재현한 7연대 상징 종대를 맨 앞에 내세우고, 두 자루의 권총을 형상화한 매스게임도 선보였다.
총대철학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우선, 무력 중시다. 김형직의 또 다른 유언인 “칼 든 놈하고는 칼을 들고 싸워야 이길 수 있다”는 정신이 북한 주민과 사회를 지배한다. 대화와 타협이 아니라 격한 물리적 충돌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는 것이 일상이다. 미국과 협상을 하면서 “강경에는 초강경”이라는 주장이 이를 보여준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자신의 최대 업적으로 ‘핵 무력 완성’을 내세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버이 수령’을 향한 절대성도 총대정신이 기반이다. 두 자루의 총을 들고 맨 앞에서 싸우는 지도자인 수령은 억압받는 인민을 해방하는 절대자인 동시에 그들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어버이라는 게 북한의 논리다. 특정한 주거지 없이 최소한의 무장으로 정규군과 싸워야 하는 빨치산 투쟁은 최악의 환경이다. 이에 따라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혁명 가족의 전통과 지도자에 대한 무조건 충성이 강조된다. 북한은 이를 발전시켜 백두혈통 최고 지도자를 정점으로 하는 거대한 가족국가를 출범시켰다. 북한이 수령을 어버이로 칭하거나, 북한 전체를 사회주의 대가정이라 주장하는 배경이다.
지난달 말 발생한 홍수피해 때 보여준 김정은의 행보는 극장국가의 전형이다. 자신이 탄 자동차가 반 이상 물에 잠기고, 구명조끼도 없이 고무보트에 타서 맨 앞에서 달리는 모습은 수령의 안위를 제일 중대시하는 북한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인민이 어려움에 부닥치자 자신의 안전 따위는 상관치 않고 달려가 구해내는 어버이 수령의 모습을 상영함으로써 주민들의 절대적 충성을 유도하려는 연출이다. ‘수령이 우리(주민)를 위해 저런 험난한 상황을 마다치 않는다’는 메시지를 담은 시나리오다.
핵 무력 역시 총대철학을 담은 영화 테제다. 김일성이 두 자루의 권총이라는 빈약한 무기로 도망 다니면서 싸웠지만, 김정은의 핵이라는 ‘절대 보검’으로 완결되었다는 것이다. 북한은 핵 억제력을 “불의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으며 인류의 미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할아버지의 피곤한 유격대 국가 시절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고 ‘인민의 행복, 웃음,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는 서사의 완성인 셈이다.
신인 주연배우 김주애
그런데 새로운 주연배우가 등장하며 줄거리가 꼬이기 시작했다. 국가정보원은 지난달 “김주애를 현시점에 유력한 후계자로 암시한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정말 4대 세습자로 김주애를 확정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김정은이 김주애를 현재 영화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흔적은 여럿이다. 특히 지난 3월 15일 김정은과 함께 온실농장 준공식 현지 지도를 한 후 노동신문이 “향도의 위대한 분들”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의미심장하다. 향도는 “혁명투쟁에서 나아갈 앞길을 밝힌다”라는 표현으로 오직 수령에게만 ‘향도자’라는 호칭을 사용해 왔다. 상징성을 중시하는 극장 국가에서 향도자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해 김주애를 포함했다는 것은 주목할 부분이다.
그러나 김주애를 신인배우로 내세운 건 김정은의 최대 패착으로 결국 극장의 문을 닫을 수도 있다. 총대철학을 기반으로 한 무력을 김주애가 대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를 차치하더라도 북한은 여성을 혁명의 주체가 아닌 조력자로 삼는다. 북한은 ‘조선의 어머니’로 부르는 김일성의 처 김정숙을 북한 여성의 전범(典範)이자 김일성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 그리고 수령의 안위와 권위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대표적인 인물로 꼽는다. 철저한 조연이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여성들의 고위직 진출에는 유리천장이 있다. 김정은이 김주애를 데리고 다니며 4성 장군의 무릎을 꿇리더라도 한계가 있는 셈이다. 또 수령을 인민의 어버이로 여기고, 어버이는 결국 남성이라는 봉건의식이 강한 북한의 사회 구조상 김주애는 부적절한 인물이다.
다른 극장 기웃거리는 MZ세대
이미 북한이라는 극장 밖에서 상영되는 다른 영화를 엿보기 시작한 북한판 MZ세대, ‘장마당 세대’는 북한 체제가 상영하는 영화에 흥미를 잃을 게 분명하다. 수십만의 아사자가 발생했던 19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 이후에 태어난 북한의 신세대는 두 가지 특성을 보인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 약화와 외부 사조에 대한 호기심이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엄마의 장마당 경제 활동을 경험했기에 국가에 대한 기대치가 낮다. 이들은 외부, 주로 한국문화에 관심도 크다. 통일부가 지난 2월 발간한 『북한 경제·사회 실태 인식보고서』에 따르면 김정은 집권 전 외국 영상물에 대한 관심은 48.1%였지만, 2016∼2020년에는 73.1%로 두 배 가까이 상승했다. 특히 20대의 관심이 다른 세대보다 높다.
이들 세대는 세습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측면도 강하다. 보고서에 따르면 김정은 집권 이전 백두혈통 영도체제에 대한 지지도는 50%였지만, 집권 이후 30.9%로 하락했다. 김정은도 이를 의식해 2020년부터 반동사상문화배격법, 청년교양보장법, 평양문화어보호법 등을 제정해 한국 문물을 접할 경우 강력한 처벌을 가한다. 이러한 법을 제정했다는 자체가 ‘괴뢰 사조’를 막지 못한다는 방증이다.
북한이라는 영화관의 운영과 관련해 선택은 김정은의 몫이다. ‘인민 대중의 사상문화와 생활’을 물리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시대다. 인간 존엄의 근본인 ‘자유’를 억압할수록 반발은 커진다. 더욱이 김주애를 내세우는 것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온 극장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빨치산이 상징하는 군사투쟁, 가족국가로 대변되는 어버이의 이미지, 유교 국가 특성인 남성중심 사회 등은 김씨 일가의 3대 세습을 뒷받침해 준 골격이다. 북한 주민들은 수령의 결정을 무조건 받아들이도록 주문받아 왔고, 이를 절대 선으로 여긴다. 그러나 김주애가 후계자가 된다면 영화의 주인공과 줄거리가 뒤죽박죽돼 흥행에 실패할 것이다. 당연히 관객은 다른 극장의 영화로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기존 영화 상영을 계속할지, 아니면 스스로 극장 밖으로 나와 핵을 내려놓고 경제를 살릴지 선택할 때가 왔다. 후자가 김정은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은 자명하다. 70년을 상영해온 낡은 영화는 끝나가고 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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