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맥주 회사에서 일하는데, 사장의 정체를 모르겠네
[이동철 기자]
▲ 서울 시내 한 식당가에서 주류 업자가 주류 상자를 옮기고 있는 모습. 해당 기사의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
ⓒ 연합뉴스 |
맥주 회사의 물류 팀 업무평가에서 우수한 점수를 받아 포상도 받는가 하면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맥주 회사의 물류 팀 관리자로부터 질책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해당 맥주 회사가 자체 개발한 물류관리 시스템에 접속하여 그날그날의 업무 지시 사항을 확인하고 업무 내용과 특이 사항을 기록하며 업무 전반에 대해 통제 감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권씨는 그 맥주 회사의 직원이 아닙니다. 권씨는 맥주 회사가 물류 업무를 위탁한 또 다른 대형 물류 대기업으로부터 재하청받은 소규모 용역업체와 근로계약을 했습니다. 맥주 회사의 로고가 새겨진 작업복을 입고 맥주 회사의 직매장에서 물류 업무를 수행하는데 그렇게 다른 회사 소속으로 짧게는 1년 만에 용역회사가 바뀌며 수년을 일했습니다. 용역회사가 바뀔 때마다 이전까지의 근속과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근로조건은 '리셋'되었습니다. 권씨의 진짜 사장님은 누구일까요? 맥주 회사일까요? 아니면 형식상 계약한 용역회사일까요?
이처럼 권씨를 비롯한 대기업 하청 노동자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처럼 서러운 삶을 살아갑니다. 사내하청, 다단계 도급, 민간 위탁 등 간접 고용이 만연한 노동시장의 경제 현실에서 권씨와 같은 간접 고용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은 실제 원청이라 불리는 실질 사용자가 결정합니다.
권씨의 임금과 근로 시간, 복무규율 등은 원청 회사가 설계하고 책정합니다. 권씨를 비롯한 동료들은 수년간을 근속하고도 매번 최저임금 수준인 근로조건을 개선하고자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노조가 용역업체에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자 돌아온 답은 "우리는 실질적으로 너희의 근로조건을 개선해 줄 힘이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권씨가 속한 노조는 원청 대기업에 교섭을 요구하고 문제해결을 요청했습니다. 원청 대기업은 자신들은 권씨와 근로계약을 한 당사자가 아니라고 또 책임을 회피합니다. 그렇다면 왜 원청 대기업이 자신과 동료들의 출퇴근을 비롯한 근태관리와 업무 지시를 하고 회사 직원 부리듯 했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2020년 OB 맥주 경인직매장에서 일했던 다단계 하청 노동자들의 사연입니다.
원청 대기업이 권씨를 비롯한 간접 고용노동자를 해당 기업의 생산시스템에 이를 편입시켜 관리하는 이유는 자사 제품과 서비스의 품질을 균일하게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상품과 서비스가 원청 대기업의 브랜드로 고객에게 전달되므로, 제품의 생산과 유통의 전 과정을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고 관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지난 2022년 6월 22일,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1도크 바닥에 가로세로 1미터 크기의 철판을 붙여 만든 공간 안에서 농성하고 있는 모습. |
ⓒ 금속노조 |
이처럼 노동현장에서는 하청 회사 노조가 실질적 근로조건의 결정 권한을 가진 원청 대기업에 교섭을 요구하면 원청 대기업은 고용계약 관계가 없다는 형식을 들어 실질적 교섭을 회피합니다. 그래서 하도급 노동자들의 투쟁은 자연스레 장기화하고 격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2022년 8월 경남 거제의 대우조선해양의 민주노총 소속 하도급 노동자들의 51일간의 조선소 도크 점거 파업, 2023년 5월 전남 광양 포스코 하청 노동자들의 파업 과정에서 한국노총 소속 간부에 대한 경찰의 유혈진압 등 최근 한국의 노동시장을 뒤흔들었던 노사의 격렬한 분쟁을 생각해 봅시다. 그 기저에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 속 간접 고용 노동자에 대한 이와 같은 원청 대기업의 탐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을 개정해 사용자의 범위에 실질적으로 하청 노동자의 근로조건에 영향력을 미치는 '진짜 사장님'을 포함해 달라고 요구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노조법은 개별적 근로계약 관계에서 노동자를 보호하는 근로기준법과는 그 취지가 다릅니다.
노동자들은 개별적으로는 고용 관계상 경제적 강자인 사용자에 비해 구조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집단으로 뭉쳐 대등한 입장에서 사용자와 교섭해야 근로조건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노조법상 사용자는 꼭 근로계약의 형식적 당사자만이 아니라 일을 하는 노동자의 근로조건에 실질적 영향을 미치거나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지배력과 영향력이 있는 자라면 사용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8월 4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일명 '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은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노조를 통해 근로조건 개선을 하기 위해 진짜 사용자에 대한 교섭권 보장을 강제하는 것을 그 핵심 내용으로 합니다. 노동시장에서 점차 증가하는 추세인 간접 고용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려하면 경영계와 정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일부 대기업 강성노조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경영계와 정부는 노란봉투법이 실현되어 사용자의 범위가 넓어지면 기업으로서는 "온갖 노동자들로부터 교섭 요구를 받게 되어 노사 관계가 불안정해질 것"이라고 우려합니다. 물론 사용자 처지에서는 경영상 신경을 써야 할 일이 많아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인건비를 아끼려고 실제 지배력은 유지하면서 형식적으로 일부 사업을 외주화하여 사용자 책임을 회피하는 행태를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경영계와 정부는 마치 노동계가 무리하게 욕심을 부리는 것처럼 비판하지만 실제 노란봉투법의 사용자 범위 확대의 문제는 법원이 판례를 통해 그 필요성을 인정한 지 오래입니다. 법원은 택배기사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의 사용자가 CJ대한통운이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리고, 현대중공업에 하도급 노동조합에 대한 부당노동행위 책임이 있다고 봤습니다. 노조법의 '사용자'에는 근로계약 관계의 상대방인 사업주 이외에도 "부당노동행위 구제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법률적 또는 사실적인 권한이나 능력을 가지는 지위에 있는 자"도 포함된다는 논리입니다.
노란봉투법은 간접 고용노동자들에 대한 원청 대기업의 사용자 책임을 명확히 하는 것에 더해 기업이 노조에 무차별적인 손해배상을 청구해 노조를 탄압하는 것을 예방하는 내용도 담았습니다.
지난 2022년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의 파업을 기억하실 겁니다. 당시 대우조선해양은 노조에 약 470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월 350만 원이 채 안 되는 하청 노동자의 임금으로 죽을 때까지 일해도 갚기 힘든 액수입니다. 실질적 손해를 노조에 변상받겠다기보다는 불법파업에 대한 형벌로 노조 간부에게 가혹한 고통을 주겠다는 뜻으로 보이는데요. 다른 노조들이 다시는 파업을 통해 기업의 경영활동을 방해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노조의 파업으로 손해를 본 기업 경영자의 분노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이러한 기업의 대응은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조합의 단결권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일정한 제약이 가해져야 합니다. 노조의 손해배상책임을 손해를 발생시킨 정도와 무관하게 모든 조합원에게 지우거나, 부당노동행위나 파업에 대체인력 투입 등 기업의 불법행위에 대한 노조의 대응파업 시 손해배상 청구권은 제한해야 합니다.
법원도 최근 현대자동차가 하청 비정규 노동조합의 파업에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에서 손해배상 청구권에 제동을 건 바 있습니다. 노조의 의사결정이나 실행행위에 관여한 정도가 조합원 사이에서 차이가 있는데, 이런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위법한 쟁의행위라고 노조와 개별 조합원의 손해배상책임을 동일하게 보는 것은 헌법상 보장된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는 내용의 판결이었습니다.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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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노란봉투법을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사용자 개념의 확대로 산업현장이 무분별한 교섭 요구로 혼란해지고 노조의 불법파업이 면죄부를 받을 것이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기업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제단체 성명과 거의 똑같아 깜짝 놀랐습니다. 기업의 편만 들며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윤석열 정부의 반노동 폭주는 어디까지 계속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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